* 2005/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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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경제연구소 윤영수 연구원과 카이스트 물리학과 박사과정 채승병씨가 함께 써서 펴낸 <복잡계 개론>을 읽었다. 실은 저자로부터 책을 직접 선물 받았다. (책값 비싸다.) 덕분에 요 며칠 동안 책을 읽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구석구석에 숨겨진 오타를 찾는 재미도 쏠쏠했다. (저자가 들어오는 게시판을 통해 일일이 체크한 오타 및 교정제안 리스트를 올렸다. 이 정도면 책값은 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복잡계, 복잡성 과학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런 내용을 다루는 책들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복잡계 연구의 방법론에 대해 잘 정리해놓은 책은 찾기 힘들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별로 찾아본 적이 없다. 복잡계 이론이라는 것도 매우 광범위한 것이라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보이는데 이 책은 그러한 시도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1-3장에 걸쳐 복잡계 이론을 다루고 있고 4장은 복잡계 이론을 활용한 은유적 분석, 5장은 복잡계 연구의 방법론, 6장은 복잡계 이론을 활용한 정통적 분석을 다루고 있다. 7장은 요약 및 결론에 해당한다.

복잡계 이론을 얘기할 때 필요한 몇 개의 핵심낱말로는 혼돈, 기이한 끌개, 프랙탈, 자기조직화, 창발 현상, 임계점, 적응, 공진화 등이 있다. 이러한 개념들이 어떠한 배경으로부터 나왔으며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책의 첫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은유적 분석이란 구체적이고 정량적인 모형을 세우는 대신 위에 나열한 개념들을 활용하여 주어진 현상들을 개념적/정성적으로 설명해내는 것을 가리킨다. 사실 물리학을 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말장난스러운 느낌을 받는다. ('정통' 물리를 하는 사람들이 내가 하는 걸 봐도 장난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심하게 말하자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은유적 분석의 효용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 은유는 무관해보이는 것들에서 유사성을 발견해내는 것으로서 언제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후에 소개될 정통적 분석을 더 잘 하기 위해서라도 은유적 분석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괜한 말이 길었는데, 내가 보기에 이 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장은 183쪽에 나온 그림 4-2다.라고 해도 책이 없는 사람은 알기 힘드므로 말로 설명해보겠다. 복잡계에서 많이 나타나는 단절적 변화가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그림이다. 안정기(평형상태)에 머물러 있던 시스템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혼돈기가 되어 혼돈의 가장자리에 진입한다. 그리하여 임계점에 도달하는데 임계점을 넘어서느냐 그렇지 못하냐에 따라 단절적 변화의 성공 여부가 갈라진다. 일단 임계점을 넘어서면 양의 되먹임이 작용하는 급변기가 되고 새로운 질서(소산구조)에 정착하면 변화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변화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임계점을 넘어서지 못하거나 넘어섰지만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 변화는 실패한다.

은유적 분석을 다루는 장에서는 이 도식을 다양한 사례에 적용하여 풀어낸다. 그 중 하나는 흑백 티비가 점유하고 있던 티비 시장에 컬러 티비가 나타나면서 어떻게 컬러 티비가 시장을 장악했는지다. 컬러 티비가 처음부터 잘 팔린 것은 아니었다. 처음 컬러 티비는 화면크기도 작고 방송채널도 얼마 안되었지만 기술개발을 통해 크기가 커지고 방송채널도 많아지면서, 즉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급속히 시장의 주종 제품이 된다. 이런 식이다.

이 다음으로는 복잡계 연구의 방법론이 분석의 초점과 기법에 따라 소개된다. 행위자 기반 모형(예; 다중 행위자 모형, 복잡 네트워크 모형), 합리적 선택 모형(예; 게임 이론), 매크로 시뮬레이션(예; 시스템 다이내믹스), 해석적 매크로모형(예; 비선형시계열 모형)이 그것이다. 책은 이 각각에 대한 소개와 설명, 응용방법, 응용사례, 많이 쓰이는 프로그램 소개 등을 통해 실질적인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여기 소개된 것들은 잘 알고 있거나(덜덜덜) 조금이라도 접해봤는데 시스템 다이내믹스는 생소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성장의 한계>도 시스템 다이내믹스의 방법론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제시한 방법론에 대해 다양한 사례를 소개함으로써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아왔던 것을 구체화시켜준다.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통적 분석을 다루는데, 위에서 소개한 여러 방법론을 이용한다. 행위자 기반 모형을 이용하여 주식시장의 극단적 변화를 이해하고, 시스템 다이내믹스 모형을 이용하여 경쟁 다이내믹스를 이해하고, 네트워크 모형을 이용하여 혁신의 확산을 이해하고 있다. 첫번째 사례를 좀더 자세히 보면, 주식시장에서 투자자들을 상품에 내재가치가 있으며 가격은 그 가치로 수렴한다고 믿는 기초 분석가와 내재가치를 믿지 않고 가격의 등락과 현실의 상황을 우선시하는 차트 분석가로 나눈다. 그리고 이들이 어떤 식으로 매도와 매수를 할지에 대해 간단한 규칙을 준 후에 이를 컴퓨터 시뮬레이션 하면 실제 주가 데이터와 같은 특성을 갖는 결과를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이다.

이 정도로 하고,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학문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던 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지침서까지는 아니라도 그러한 시야를 갖게 해주는 것은 좋지만 전반적으로 경영자나 관리자의 입장에서 책이 씌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단적으로 은유적 분석의 사례1로 나온 "CEO의 의사결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잭 웰치 등 경영자의 사례를 들며 웰치는 "GE의 가치와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정리했다"고 하는데 누구를 어떻게 정리했는지 몰라도 정리당한 사람 입장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예전에 <컴플렉소노믹스>를 읽었던 것도 떠올랐다. 조직이나 경영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런 이론들을 그대로 좀더 많은 사람들이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활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라고 상상만 해본다.

이 책은 공진화를 얘기하면서도 경쟁과 적자생존 역시 받아들이고 있다. 경쟁과 적자생존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틀린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세상에는 권력이 없는 사람도 있고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권력의 크기가 클수록 더욱 엄격한 경쟁이 필요하며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라서 문제다.

다시 돌아와서, 재미있었다. 특히 복잡계 방법론, 정통적 분석 부분이 흥미로웠고 꽤나 많은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낸 저자들이 대단해보였다. 책을 선물해준 저자에게 감사드리며 이만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