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후반부터 에리체 스쿨에 대해 정리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서 자세하게 하지 말고 간단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에리체 스쿨은 언어학자, 통계물리학자(특히 사회물리학 연구자), 인공지능/인지과학 연구자들이 모여 언어 진화에 관한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언어 진화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이미 국어시간에도 배웠던 언어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다만 진화론, 복잡계, 자기조직화, 연결망 이론 등의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언어 진화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스쿨 주최자 중 한 사람인 Luc Steels 교수는 "언어학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어학자는 모르고 있다."고 할 정도로 자신감을 보였다. 특히 구성문법(construction grammar) 이론을 기반으로 로봇을 이용하여 언어의 발현과 진화를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는데 나는 잘 모르는 분야라 그런가보다 했다.

덕분에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언어학 강의를 들을 수 있었는데, 인지과학 전공자이신 분께 들으니 유명하신 분들이라고 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발표로는 수많은 사진과 도표로 이루어진 고고학자의 발표와 발달 심리학의 관점에서 어린 아이들이 몸짓을 어떻게 언어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를 다양한 동영상을 통해 보여준 발표였다. 역시 그림과 동영상이 들어가야...

이외에도 발표자/참가자의 다수를 차지한 통계물리학자들의 발표를 들을 수 있었다. 이미 재작년 독일의 사회경제물리학 여름학교에서 뵈었던 분들을 비롯하여 논문으로만 알고 있던 폴란드의 K. Sznajd-Weron, 아르헨티나의 D.H. Zanette, 프랑스의 Serge Galam 등을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특히 오래전부터 사회물리학을 연구해왔으나 물리학 커뮤니티에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던 Galam 교수(직책이 이거 맞나?)는 자신의 발표에서 사회물리학은 사회심리학 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딱 내가 생각하고 있던 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Sznajd-Weron 교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70대 중반이라는 나이임에도 발표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날카로운 듯한(내가 질문 내용을 잘 못알아들어서;;) 질문과 코멘트를 던지던 M. Fisher 교수의 강연이 기억난다. 그런데 강연 내용은 역시 내가 잘 못알아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물리학자가 아닌 연구자내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보니 대충 알고 있는 줄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내용이었다.

물리학자들이 언어 현상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Stauffer 교수의 논문을 통해 조금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많은 (그래봤자 그리 많지는 않은) 언어물리학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개중에는 언어학자와 물리학자의 공동연구도 있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접근하는 방식이나 모형들은 행위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언어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수많은 모형이 제시되었지만 그럴수록 나도 '그래서 뭐?'라고 물으며 딴짓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언어학자들의 접근 방식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현상을 기술하는데 그치거나 전체적인 그림이 없다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었다. 또한 언어 진화를 말하면서 언어학에 진화론을 진지하게 접목하려는 시도가 없는 듯 하다는 생각을 한 다음날 진지한 접근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또 놓치고 있는 듯한 것으로 인지과학적인 측면이었다. 언어는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자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데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이런 요인을 무시하거나 하는 얘기들이 많았다. 물론 이런 부분을 고려하는 연구에 관한 발표들과 문제제기도 이어졌다.

그래서 결국 뭘 어쩌자는 것인가? 다시 스쿨 주최자 중 한 사람인 Steels 교수가 제시한 비전을 따르면 행위자가 언어를 어떻게 인식하고 범주화하고 일반화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유통시키고 활용할 수 있는지를 인지과학뿐만 아니라 통계물리학의 연결망 이론, 동역학 이론 등을 적극 도입하여 이해할 수 있는 학제간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이제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도인 듯 한데 앞으로의 성과가 기대된다.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는 내가 느꼈던 점은 언어물리학 분야의 물리학자들이 나름 확실한 동기와 흐름 위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냥 한 번 재미로 해봤다.는 아닌 듯 하다. "두 문화"에 관한 패널 세션에서 Fisher 교수도 스쿨에 모인 물리학자들에게 "물리도 수학도 포기하고 더욱 진지하게 언어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라"는 충고를 던졌다.

* 참고로 발표자료는 스쿨 홈페이지에서 일부 다운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