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 걸려 있던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논문을 다시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커피를 마시러 갔다가 우편함에서 한국물리학회의 격월간지인 <물리학과 첨단기술> 2007년 7/8월호를 집어왔다. 사실 회원이라 매번 받아보지만 잘 안보는 편이다. 그런데 오늘,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아태이론물리센터(APCTP)에서 펴내는 잡지인 <크로스로드>에 실렸던 것이 다시 실린 것인데, 철학박사논문을 쓰고 있다는 전대호씨의 "행동학자 에드와 나눈 대화"라는 글이다. [다운로드]

에드가 누구인가 했더니 <통섭>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이다. 사회생물학으로 유명하고 최근 학문의 대통합을 주장하는 <통섭>으로도 유명한데(?) 이 '통합'이 생물학으로의 흡수통합이 아니냐하는 비판과 통합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하는 더 근본적인 문제들이 있다. 철학전공자인 글쓴이는 "과학이 인간의 이중성을 감당할 수 있는가?"라고 물으며 윌슨 같은 행동학자들의 도전에 강하게 맞선다.

글쓴이의 예를 그대로 들어보면, 행동학자들의 행동을 연구한 행동학자가 자신의 연구결과를 행동학회에서 발표하는데, 자신의 연구대상이 된 행동학자들에게 대화를 청하는 상황이 이중적이라는 말이다. 이건 어떨까? 내가 지도교수를 연구하여 그 내용을 지도교수 앞에서 발표하고 조언을 듣는 상황. 서로 존중하는 관계라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싶기도 하다;;; (역시 난 인문학보다 과학쪽인가?) 그런데 이 경우 객관과 주관이 분간되지 않아, 과학의 기본 전제인 '객관성'이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건 과학이 아니라고 한다면...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럼 거기서부터는 인문학의 영역인가?

좀더 읽다보면 에드와 글쓴이 사이의 '거대한 심연'이 명확해진다. "에드는 뉴런에서 출발하는 사회학을 원하는 모양이지만, 나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 칸트가 말한 목적왕국(자유로운 시민들이 이룬 공동체, 곧 국가)에서 출발하는 사회학을 원한다." "... 행동학자는 이를테면 유인원 집단을 모형으로 삼아 인간의 선거 행동을 연구하고 유용한 결론들을 얻어 선거운동 캠프에 승리의 비법으로 은밀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DNA가닥으로 채찍을 만들어 갓 태어난 국가의 이상을 후려치는 형국이다. 아예 동아줄을 꼬아 국가의 목을 매다는 형국이다." 말했듯이 차이는 명확하다.

다윈주의 좌파라는 말을 꺼내고 싶어지다가도 괜히 움츠러든다. 그 심연을 건널 수 없어도 서로 불빛을 주고받으며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얘깃거리로 꺼낸 것인데, 섣불리 중재할 수 있는 일도 아닌 것 같다. (소심소심...) 글쓴이는 에드에게 "니체가 말했듯이 너무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도리어 그 심연이 너를 들여다볼 때까지' 들여다보라. 그리고 나서 인간을 논하라"고 충고하는데 나는 행동학자는 아니지만 어쩌면 행동학자보다 더 급진적일 수 있는 사회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일단 글쓴이가 제기한 문제를 더 곰곰이 생각해봐야겠다.

그런데 에드 에드 하니까 <강철의 연금술사> 에드가 생각난다는... 그러고보니 그 에드도 생명공학으로 사회의 금기에 도전했던 인물이로군. 자세한 내용은 <강철의 연금술사> 감상평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