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봄에 네이버 블로그에 시리즈로 썼던 글들 중 하나.

* 2005/06/13

발현 성질이란 낮은 수준의 성질로 환원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성질을 가리킨다. (단순한 모형에서 복잡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발현'은 '발현 성질'의 정의와는 분명히 다르다. 오히려 복잡한 현상이 단순한 모형으로 설명될 수 있으므로 그 복잡한 현상을 발현 성질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여기서 '수준'이란 관찰하거나 고려하고자 하는 영역의 크기에 따른 구분인데, '전체를 이루는 부분들'에서 전체가 높은 수준, 부분이 낮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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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을 보자. A = B 이고 C = D 이지만 A, B와 C, D는 다르다. 신념으로서의 환원주의는 A와 C가 같다고 생각하는 오류다. 방법론적 환원주의는 B의 각 부분과 그들의 상호작용을 이해함으로써 A를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앞 글에서 썼듯이 이는 '전체를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고 하는 말은 각 요소들(네모들) 사이의 상호작용(붉은 선)을 고려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한 말이다. 즉 A = B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A > C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부분'에 상호작용까지 포함시킨다면, 전체는 부분의 합과 같고, 또한 각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으므로 발현은 없다.

B의 각 요소들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것은 곧 A에서 나타나는 성질을 이해하는 것이다. '각 요소들'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분해라면 '그것들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은 종합이다. 지금까지는 분해에만 치중해왔다면 최근의 흐름은 종합이다. 요소들에 대한 이해는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 없이 부족하며 상호작용에 대한 이해는 요소들에 대한 이해 없이 불가능하다. '병의 생심리사회적 모형'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그러나 여전히 '불도저를 쿼크로 모형화하지 말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쿼크에 대한 이해 없이 불도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쿼크를 몰라도 불도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불도저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불도저를 이루고 있는 '물질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쿼크에 대해 100만가지의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불도저의 작동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그 중의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이건 중요한 문제다. 사회현상을 모형화할 때에 우리가 쿼크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현상의 경우, 사람들이 TV 광고와 주변 사람들의 평가 중 어디에 더 의존하는지만 알면 된다. 여기서 끝.일 수도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그 현상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동기가 무엇인지, 어떻게 판단을 내린 것인지, 유전적인 요인은 없는지 등을 따지고 들어가다보면 우리는 쿼크를 알아야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쿼크와 그들의 상호작용을 계산함으로써 이 모든 것들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면 우리는 '완벽한 이해'에 도달한 것인가?

'예'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또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른 수준의 언어가 나의 수준의 언어로 통역되지 않으면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즉 이해란 통역가능성이다. 제 아무리 완벽한 컴퓨터로 재현된 우주라도 우리의 언어로 옮겨지지 않으면 우리는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입자들의 운동으로부터 우리가 실제로 느끼는 온도, 압력 등을 설명해야만 한다. 나겔의 '환원의 두 가지 조건'과 비슷한 주장이 되어버렸다.

너무 멀리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