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 쓴 '메모'라는 글에서도 밝혔듯이 경제물리학교에 다녀왔습니다. 포항에 있는 포스텍에서 4일 동안 열린 경제물리학교(APCTP School on Econophysics)에는 스위스 ETH의 소네(D. Sornette) 교수, 대만 국립쳉치대학의 첸(S.-H. Chen) 교수, 아주대의 구형근 교수께서 각각 9시간, 8시간, 6시간의 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일본 국방아카데미의 나마타메 교수(?)도 1시간 세미나를 해주셨습니다. 주요 강의 내용은 소네 교수의 금융시계열분석, 첸 교수의 행위자기반모형(ABM), 구 교수의 금융수학의 방법론이었습니다.

사실 소네 교수만 이름을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예전에 연구실에서 소네가 쓴 <자연과학의 임계현상(Critical phenomena in natural sciences)>라는 책을 공부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금도 물리학, 지구물리학, 경영학 등 여러 학과에 겸임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금융쪽으로는 아직도 별로 관심이 없는데요(관련 논문을 몇 개나 썼음에도;;) 그래도 학제간 연구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을 소네 교수가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서론이 길어졌는데, 이번 학교를 통해 저는 그동안 사회물리/경제물리에 대해 갖고 있던 질문에 대해 ABM을 연구하는 첸 교수로부터 어느 정도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경제현상으로부터 모형을 만드는 과정에서 단순화할 수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정당화할거냐.라는 질문입니다. 또한 모형이 현실을 어느 정도 재현해낸다고 해도 그게 그 모형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건 아니라는 문제제기입니다.

열현상을 미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분자, 원자 수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고 이로부터 거시적 현상을 이해해왔듯이 사회경제현상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할 때에만 단순한 모형들이 정당화되고 좀더 확고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입니다. 이 얘기도 제 블로그에서 너무 많이 해서 이제 질리네요;;;

첸 교수 역시 이러한 비판과 문제제기를 많이 받아왔는지 "The usual defense"와 같은 제목의 슬라이드를 준비해왔습니다. 또한 '영지능 행위자(zero intelligence agent)' 모형에 관한 논의를 통해 인간의 합리적 행위라는 조건이 적어도 금융시장의 어떤 거시적 특성을 설명하는데 필수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관련해서 제가 예전에 다운받아놓고 보지 않았던 파머(Doyne Farmer)의 2005년 PNAS 논문의 초록을 조금 봤는데요, 영지능 행위자 모형으로도 실제 현상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으며, 행위자의 전략적 행위가 다른 요인들에 의해 무시될 수 있는(dominated)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첸 교수는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근거로 영지능 행위자를 가정하고 쓰지만, 물리학자들은 그들에게 친숙하기 때문에 영지능 행위자를 가정한다고 했습니다. 동기는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는 거죠. 하지만 저는 여전히 못마땅했는데 그래서 쉬는 시간에 영지능 행위자 가정이 성립되는 조건(또한 그것이 성립되지 않을 조건)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그런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그에 대한 답은 '규모가 잘 분리되느냐'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위에서 말한 모형이 현상을 재현한다고 해서 모형이 맞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문제제기에 대한 답은 결국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요구하는데, 첸 교수는 강의를 통해 실험경제학, 심리적 요인을 고려한 경제모형 연구 등을 소개했습니다. 제가 <행동경제학>이라는 책을 보면서 행위자의 심리적 요인을 고려한 모형 연구를 해볼만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미 하고 있더군요.

또한 인간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지능적인지에 관한 논의들을 통해 ABM이라는 방법론이 실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연관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까지 거시적 현상을 미시적 모형으로 설명해내고자 하는 것만이 ABM의 이유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리학도 거시적 현상을 미시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다가 분자, 원자, 원자핵, 쿼크...로 들어가면서 물질과 에너지, 이들을 매개하는 힘과 그것의 본질에 대한 탐구로 이어졌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사회과학자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얘기인가요?

이런 관점에서 소네 교수가 금융시계열분석을 통해 여러겹 쪽거리(multifractality)나 띄엄띄엄 규모 불변(DSI)을 관찰했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게 금융시장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금융시장에 참여하는 투자자나 기관이나 정보의 흐름이나 위계구조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만족할만한 답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또는 영어를 잘 못들어서 제가 놓쳤을 가능성도;;;;)

실제로 DSI를 제시하면서 든 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룹의 (정적인) 규모에 관한 데이터였는데, 나중에 금융시장에서는 왜 DSI가 나타나냐고 물어보니 금융시장에서 나타나는 DSI는 동적으로 발현되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정적이든 동적이든 DSI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분석이야 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그 분석이 현상/대상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알아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소네 교수의 답변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다른 참가자들이나 포스터 발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느낀 점을 쓰고 마치겠습니다. 사실 사회경제현상의 모형은 어느 정도 복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모형의 어떤 요소가 가장 중요하고 다른 요소는 덜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지를 집어내기 위해서는 결국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통찰력으로 알아낸 핵심은 그리 복잡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모형이 단순하냐 복잡하냐... 이런 건 문제가 아니고 복잡한 현상의 단순한 핵심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걸 간명하게 표현할 거냐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이건 물론 경제물리학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죠. 마침 이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 TV에서는 <매트릭스2>가 방영되고 있더군요. 영화 속의 니오야말로 복잡한 매트릭스 코드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을 지닌 인물이겠죠.

* 학교를 열어 좋은 기회를 준 조직위원회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