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나는 환원주의자다. 그렇다고 내 정체가 다 밝혀진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환원주의는 '전체는 부분들과 그것들의 상호작용의 합이다'라는 주장이다. '전체'를 '부분들'과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환원'한 것이다. 변주를 하자면, 거시적인 복잡한 패턴은 미시적인 단순한 규칙으로부터 나타난다(emerge).

그렇다고 하여 모든 거시적인 복잡한 패턴이 언제나 미시적인 단순한 규칙으로부터 나타날 필요는 없다. 거시적인 복잡한 규칙에 의해 거시적인 복잡한 패턴이 나타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하나의 현상에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면 더 단순한(경제적인) 쪽을 선택하고자 하며, 사실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은 주로 더 경제적인 해석을 찾기 위한 노력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수소, 헬륨, 리튬, 베릴륨 등 원소의 이름을 일일이 외울 필요 없이 각 원소의 양성자의 개수에 따라 1, 2, 3, 4 ... 번이라는 번호를 붙이는 것이 더 단순하고 알기 쉽다. 천체의 운동과 내가 던진 공의 운동을 다른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중력과 관성의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다. 등등.

만일 우리가 거시적인 복잡한 현상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그 현상의 배후에 깔려 있다고 가정할 수 있는 미시적인 단순한 규칙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러한 '이해'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여기서 이해라는 낱말에 따옴표를 했는데 주어진 현상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일관된 방식으로 설명해낼 수 있으며 그것이 타당한가라는 질문과 얽혀 있는 단순하지 않은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늘 하는 얘기로, 우리가 소립자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도달했다고 하여 우리 은하의 형성과 인간 사회의 복잡성이 '자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소립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그것들의 집합적인 행동이 그보다 큰 규모의 현상들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그보다 더 큰 규모의 현상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등등이 모두 명백히 설명되어야만 비로소 우리는 이 세계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 미시적인 이해가 필수적이다.

경험은 거시적이다. 입자가속기에서 벌어지는 실험도, 그 결과도 거시적이다. 인간과 인간의 인식 자체가 거시적이기 때문에 '미시적 경험'은 모순이다. 우리에게는 거시적 현상이 주어져 있고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분해와 종합이라는 방법을 이용한다. 여기서 '분해'가 반드시 그 현상을 분자 단위로 쪼개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리에 모드로 나눌 수도 있고 웨이블렛으로 분해할 수도 있다. 사실 이런 방법에 '미시적'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어쨌든 그런 분해를 통해 주어진 현상을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모드들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보려면 결국 시스템을 분해가능한 수준까지 분해해야만 할 것이다.

정리가 잘 안되지만 거칠게나마 내 생각을 써봤다. 약점이 많다. 그 중 하나는 국소성(locality)을 부정하는 양자역학이다. EPR 역설로 알려진 사고실험과 이를 검증하려는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이 여전히 맞다고 밝혀진 것으로 안다. 만일 그렇다면, 비국소적인 원리가 이 자연세계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고 '미시적 요소'에 내포되어 있는 (것 같은) 국소성이 부정되어야 한다. 비국소성과 발현/환원주의/전일주의 논의가 어떻게 연관될 수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여기까지.

* 참고: EPR 역설에 관한 알기 쉬운 설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