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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의 1권만 본 적이 있다. 나머지도 마저 읽어보고 싶었지만 책 살 돈도 없었고 친구가 사서 보길래 빌려보려다가 그냥 흐지부지 넘어간 것 같다.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머리가 더 굵어지고난 후에 학교에서 주입당했던 민족주의적 감성에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재미있어했던 것이 아니었나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소설이든 그 소설이 모델로 했다는 이휘소 박사든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작년이었나, 물리학회에 갔다가 얼핏 <이휘소 평전>이라는 책이 가판에 놓여있는 것을 보았고 또 뭐 그저그런 책이 적당히 나왔나보다 하며 지나쳤다. 그런데 어떤 블로그에서 이 책에 관한 글이 있었고 비교적 객관적으로 씌어졌다는 말을 보았다. 내가 선입견을 갖고 대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사서 읽어보기로 했다.

요즘은 보통 지하철을 탈 때에만 책을 읽는데(;;) 지하철을 탈 일이 별로 없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럼에도 담담한 어조로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는 책이라서 그런지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술술 넘어가는 편이었다. 특히 글의 첫머리부터 소설 등에 의해 이휘소 박사에 대한 잘못된 사실에 근거한 이미지가 유포되어왔다고 일갈하는 것이 집중력을 높이게 했다.

이휘소 박사는 70년대 독재정권과 유신체제에 반대했고 핵무기 개발도 반대했으며 한국에서의 이론물리학 발달에 기여하고자 했으나 고심 끝에 독재 정권 산하의 정부 기관에 의한 초대는 거절하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그 사본이 책에 실려있다.

전기가 그렇듯 이 책은 이휘소 박사의 어린시절부터 다루기 시작하여 스무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단기간에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어 훌륭한 연구를 했으나 1977년 6월 불의의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결론은, 이휘소 박사는 한국인으로서 세계 정상급의 훌륭한 물리학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태생은 한국이지만 한국전쟁 직후의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교육받기도 힘들었고 결국 제대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 간 이후였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자이기도 했으므로 한국이 모국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렇게 강조할 이유가 없어보인다.

사실 이런 걸 따지기보다는 학자로서 그의 태도와 열정을 보고 배워야 할 것이다. 얼마 전에 내 블로그에도 잠깐 썼지만, 책에 따르면 그가 좌우명처럼 생각했던 것이 "남들이 아는 것은 내가 알아야 한다. 내가 모르는 것은 남들도 몰라야 한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러한 경지에 올랐던 것 같다. 물리에 관한 일을 제외하면 사람들도 만나지 않고 연구에만 열중한 시기도 있었는데, 이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소개되고 있다.

비교적 좋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환경 탓만 하려고 드는 마음이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다. 열정적으로 하고자 하는 연구에 매달리고 그것을 즐거워한다면 어느 순간 환경의 제약을 넘어서서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잡고 저기 쌓여있는 논문들을 흘깃 쳐다보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