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뭇 비장한 제목을 달았는데 정말 곰곰이 생각해보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복잡계라는 분야가 너무 잡다하고 산만해서 정신이 없다는 것뿐 아니라, 그럼에도 나는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하는 큰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그걸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준이 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재미있으면 되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논문을 쓰다보니 사람들이 잘 봐주지도 않는다. 언제나 다음에 갈 자리를 고민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런 안일한 태도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그렇다고 내가 재미있어 하는 문제를 끝까지 파고들어서 나만의 분야라 부를 수 있는 연구를 하느냐...하면 그러고 싶지만 잘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연차는 늘어나고 지원할 수 있는 자리는 줄어든다.


위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니 할 말이 없음;;;


그럼 첫번째 문제로 돌아가서, 최근 각종 데이터 분석 위주의 연구들이 산만하다는 얘기를 해보자. 연결망과학회(NetSci)나 유럽복잡계학회(ECCS)를 비롯해 관련 학회를 다니다보면 온갖 방법을 써서 온갖 데이터를 다 분석하려고 하다보니 마지막에는 "그래서 뭐?"라는 질문만 남곤 했다. 물론 연구 분야가 확장하는 과정이다보니 과도기로서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뭔가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갈 생각을 하기보다는 이번엔 이 데이터 연구, 다음번엔 다른 데이터 연구... 이런 식으로 논문만 찍어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연구를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현상을 기술하는 것을 넘어서서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소홀한 모습이 아쉽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라도 분석한 결과들이 쌓이다보면 점점 더 직관이나 통찰력이 생겨서 어느 순간 질적인 도약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저절로 된다고는 보지 않고, 또 그만큼 그 목적에 맞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이를테면 물리학자들이 할 수 있을까? 보편성이라는 강력한 개념이 있기는 하지만 바로 그 보편성 때문에 구체적인 설명에 약하고 그래서 결국 뻔한 얘기만 하다 끝나는 경우도 많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느냐 하면 사실 자신은 없다. 첫 문단에 쓴대로 이런 생각은 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없고 그렇다보니 설득력도 떨어지고 그래서 결국 도태되고 말겠지.


나도 이대로는 안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실력이 생기지도 않고 취향이 바뀌지도 않는다. 다만 내 문제의식을 구체화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너무 어렵게만 하려고 하지 말고, 한 걸음씩 진전하는 거다. 자, 그런데 어떻게 할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