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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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르 부르디외의 <과학의 사회적 사용>을 읽었다. 이 책은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다른 과학사회학 책들하고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선입견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최근 사회학 강좌를 들으며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알게 되었고 강사께 쉽게 설명한 책이 없느냐고 여쭤보니 이 책을 소개해주셨다. 얇기도 얇고 또 재미가 있어서 한 번 읽고 정리한다고 다시 읽었다. 나처럼 과학의 사회적 사용에 관심이 있지만 사회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 보기에 딱 좋은 책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선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대한 설명을 요약해보겠다. 정치, 과학, 예술, 역사 등 각 분야는 연구의 대상이며 이 대상들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 하나는 내부적 해석이며 특히 과학의 경우 과학은 외부의 영향 없이 내적인 논리에 따라 발전한다는 식의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외부적 해석으로 과학의 발전이 사회의 영향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식의 관점이다. 부르디외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넘어서기 위해 '장'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한다. 각 장은 나름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며 외부로부터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 소세계라고 할 수 있다. 자율적일수록 외부의 구속과 외압을 굴절/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 또한 이로써 자율성이 얻어진다.

장의 근원은 그 장 안의 행위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객관적 관계구조'이다. 행위자들은 이 구조에 의해 결정된 위치에 따라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결정되며, 그것은 곧 그 행위자의 '과학적 자본'에 의존한다. 과학적 자본이란 특히 지식을 바탕으로 동료-경쟁자 집단으로부터의 인정과 신뢰에 의한 것이며 물질적 자본이 아닌 상징적 자본에 해당한다. 또한 과학적 자본이 행위자들에게 분배되는 방식에 의해 객관적 관계구조가 결정된다. 이로부터 '과학적 자본가'가 정의되기도 하는데 뒤에 다룰 것이다.

장은 세력들 사이의 투쟁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과학장(과학에 해당하는 장)에도 내재적 경향성과 객관적 확률성이 존재한다. 내재적 경향성이란 과학의 발전이 갖는 경향에 대한 것으로 그 장에서 태어난 자들은 무의식적인 위치선정 감각을 지니며, 럭비 선수가 공이 어디로 튈지 짐작하여 움직이는 것처럼 이들은 계산하지 않고도 어떤 연구를 해야 하는지 선택하여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객관적 확률성에 대해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부르디외의 중요한 개념인 아비뛰스(habitus)가 잠시 소개된다. 이는 행위자들이 사회적으로 획득한 습성을 가리키는 말인데 어떤 장에서 얻은 습성을 지닌채 다른 장에 편입되면 그 장의 법칙에 순응하지 않고 저항/반대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한다.

다시 과학장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얘기가 이어진다. 정리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번호를 붙이겠다.

1. 과학장의 행위자들은 과학이 지니는 '순수한 관심과 불편부당한 이해'라는 환상을 이용하지만 그렇다고 행위자들이 순수하기만 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환상을 생산함으로써 이익을 보상받는다고 한다. 이를 '반(反)경제적 경제'라고 부른다.

2. 과학장이 타율적일수록 불완전경쟁이 되며 이는 비과학적인 힘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다. 과학장이 자율적일수록 완전경쟁이 되며 외부의 개입을 차단하고 과학장에서의 사회적 제약은 곧 논리적 제약이 된다.

3. 과학장에서의 투쟁과 세력다툼은 다른 장들과는 달리 '객관화 작업'에 대한 합의가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여러 이론이 경합할 때 실험을 통해 어떤 이론이 맞는지를 가려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이 항상 명쾌한 것은 아니다.

4. 과학적 자본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세속적/제도적 권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정치적 전략에 따라 과학 관료가 된 사람들에 의해 대변되는 힘이며, 간단히 '제도화된 과학적 자본'이라 부르자. 이와 반대로 발명/발견을 통해 과학발전에 기여한 학문적 능력에 의한 과학자의 개인적 '위신'을 들 수 있는데, 이를 '순수한 과학적 자본'이라 부르자. 이 두 가지 자본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 둘의 조화와 상호보완은 잘 이용된다면 과학장의 자율성을 획득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장이 불완전할수록 세속적 권력의 개입이 많아지며 세속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학적 권력을 이용하는 경우도 생긴다.

마지막으로 '관점'에 대한 논의가 이어진다. 객관적 관계구조 속의 행위자들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기본적으로 편파적인 관점을 갖는다. 그러므로 다양한 행위자들의 의견을 모아서 이들의 의견에 거리를 둠으로써 객관화 작업을 시작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며 앞서 말했듯이 과학장에는 객관화 작업에 대한 합의가 존재한다.

대충 이 정도다. 이 책은 프랑스의 국립농학연구소에서 만들어진 '과학이란 무엇인가' 그룹에서 부르디외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었고 이를 정리한 것이다. 부르디외는 자신의 이론에 바탕하여 국립농학연구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자율성 획득을 위한 방법을 제시하며 언론에 의해 생산된 여러 문제들의 허구를 폭로하고 사회에 개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특히 에밀 졸라의 사례에 대해, 자율성을 획득한 문학장이 그 자율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외부에 대해 목소리를 냈다고 해석한다. 또한 그러한 활동을 통해 진짜 문제들을 가려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학장에 대한 '사회적 수요'의 형성에 개입하는 일이기도 하다. 부르디외는 각 장의 행위자들은 '보편적 이익/목표'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보다도 자신의 자율성을 얻고 방어하기 위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정리하는 것만도 힘이 들어서 더 깊이 생각해보지는 못했는데, 물리학의 개념과 연관지을 수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것만 얘기해보겠다. 부르디외의 장은 곧 물리학에서의 장(field)이기도 하다. 입자들은 장을 형성하고 또 그 장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어떤 위치에 있느냐로 그 입자의 에너지(자본)가 결정되며, 자본의 분배는 곧 통계역학의 분배함수(partition function)를 연상시킨다. 등등. 일단 머리 속에 넣어놨으니 시간날 때 되씹어봐야겠다.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