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문득 RG(renormalization group; 재규격화군; 되틀맞춤 무리)가 생각났다. 파란불(녹색신호)에서 노란불을 거쳐 빨간불(적색신호)로 바뀌는 동안 달리던 자동차는 멈추거나 달리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자동차의 속도가 0이 되거나 0보다 커야 한다. 또 다른 말로는 신호를 지키거나 어기거나 둘 중의 하나다.

그런데 우리가 이 상황을 좀더 높은 곳에서 거리의 자동차들을 거칠게 본다(coarse-grain)고 해보자. 즉 블록 단위 또는 동 단위, 더 높이 올라가면 구 단위나 시 단위로까지 볼 수 있다. 신호등 단위, 즉 신호등이 있는 곳마다 신호가 지켜지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듯이 블록 단위로 신호를 준수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한 블록과 이웃한 블록의 경계에 있는 신호등을 어기는 경우에만 블록 단위에서 신호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하고, 한 블록 내에서는 신호를 어기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자. (이것이 바로 '거칠게 보기' 방법이다.) 그리고 한 블록 안에 몇 개의 신호등이 있느냐는 눈금인자(scale factor)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가장 자세한 눈금(신호등)의 크기와 그보다 큰 눈금(블록)의 크기의 비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눈금을 바꾸는 변환을 RG 변환이라고 한다.

만일 규모(scale; 눈금)를 바꾸어도 시스템이 보여주는 특정한 성질이 똑같이 나타난다면(invariant), 말 그대로 눈금불변성(scale invariance)이 있다고 한다. 이는 통계물리의 임계현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며 우리가 다루는 시스템에 자기유사성 구조가 나타난다는 것을 뜻한다. 신호등 단위로 보나 블록 단위로 보나 신호를 어기는 자동차의 비율이 일정하게 유지된다면 눈금불변성의 예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눈금에 대해 변하지 않는 특성을 신호등 앞을 지나가는 자동차의 속도에 연관지어 보자. 우리가 지금 다루는 시스템이 임계점에 있다면, 자동차의 속도는 RG 변환에 대해 불변이어야 하므로 원래 자동차의 속도 v와 RG 변환한 후의 속도 v / (눈금인자)가 같아야 한다. 즉, v = v / (눈금인자)이다. 그런데 이 식을 만족시키는 v는 두 가지 밖에 없다. 0이거나 무한대이거나.

자동차들이 빨간불로 변하려는 신호등 앞에서 모두 멈춘다면 어떤 눈금으로 시스템을 봐도 신호를 어기는 비율은 0으로 보일 것이다. 반대로 자동차가 무한대의 속도로 신호를 어긴다면 역시 어떤 눈금으로 봐도 신호를 어기는 비율은 0보다 큰 값으로 보일 것이다. 사실 두 경우 모두 횡단보도를 건너는 나에게는 피해가 미치지 않는데, 차가 신호를 지키든 무지하게 빠르게 내 앞을 지나가든 나는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일 옆 블록에서 신호를 무시한 자동차가 내가 건너고 있는 횡단보도를 지나간다면 낭패. 시스템이 주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방금 지나간 자동차가 다시 내가 건너는 횡단보도를 지나간다면 역시 낭패다. 하지만 시스템을 잘 정의하여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는 순간의 자동차의 행동에 대해서만 위의 논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방금 말한 낭패는 적절히 제거될 수 있다.

농담한다고 한 페이지를 써버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