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전에 플레너리 세션 하나와 커피 브레이크 이후 볼츠만 메달 수상 강연이 있었고 오후는 자유시간이었다. 플레너리 세션의 첫 발표자는 A. Vespignani였는데 내가 2001년에 연결망 위의 전염병 확산 모형을 공부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람이다. 그 이후로도 이 분은 계속 이쪽으로 연구를 해오고 있다. 통계물리학이 그동안 여러 분야에서 성공적이었는데 전염병 확산에 대해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그러고 싶은 것 같다. 재미있는 주제였고 발표도 깔끔한 편이었고 연구 결과를 시각화하여 보여주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박수를 치면서도 뭔가 알 수 없는 허전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았다. 누군가가 날마다 일기예보를 하듯 날마다 전염병예보를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는데, 이런 연구가 실제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인정하는데도 뭔가 2% 부족함이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했다.

다음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룩 대학의 R. Grimm이 매우 낮은 온도에서 페르미 가스의 거동에 관한 실험 연구를 발표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금까지 들은 발표나 포스터나 주로 이론적인 연구였고 다른 분야의 내용들을 봐도 이론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분은 실험가로서 10^-9 켈빈 정도의 극저온 환경을 만들어서 여기서 나타나는 Bose-Einstein condensation을 비롯하여 여러 다양한 실험에 대해 소개했다. 그런데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더라. 마지막에는 두 종류의 원자를 붙여서 유사핵 분자(quasinuclear molecule; 이 말이 맞는건가?)를 만들려고 한다고 했는데 연구를 진행중이라고 한다.

커피 브레이크가 끝나고 수상식이 있었다. 우선 '젊은 과학자 상(young scientist award)'은 두 명의 젊은 과학자에게 주어졌는데, 스핀 유리와 스핀 유리 상전이에 관한 연구를 한 G. Biroli 박사와 비평형 정상상태에 관한 연구를 한 T. Sasamoto 박사가 주인공들이다. 이 상은 작년에 제정되어 올해 처음 수여되었다. 그리고 1974년에 제정되어 1975년부터 수여되기 시작한 볼츠만 메달의 올해의 주인공은 통계물리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 분야의 발달에 기여한 K. Binder 교수와 비평형 통계역학 등에 기여한 G. Gallavotti 교수였다. 커토시스(kurtosis)와 Binder's cumulant 모두 Binder 교수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양으로 알고 있다. Gallavoti 교수가 선구적인 연구를 한 요동이론은 비슷한 시기에 Evans, Jarzynski, Crooks, Cohen 등이 연구하기 시작하여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다. 이중 Jarzynski는 내일 플레너리 세션의 강연을 할 계획이다.

하여간 두 볼츠만 메달리스트의 강연이 오후 1시 10분까지 이어졌다. Binder 교수의 강연은 자신이 연구를 시작한 1960년대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전에도 서양의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고 했던 존 폰 노이만이 Monte Carlo 시뮬레이션을 하는 사람은 죄를 짓고 있다라고 할 정도로 시뮬레이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험을 통해 알 수 없는 영역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오히려 이론가들이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다보니 실제 세계와 동떨어지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그런데 전체적인 흐름을 짚어주기보다는 자세하게 이것저것 알려주는 형식이다보니 나중에는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Gallavotti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다. 비평형 열역학을 공부하면서 연구실 선배가 알려줘서 Gallavotti 교수의 홈페이지를 알게 되었고 길고 긴 논문 목록을 보면서 참 대단한 사람이다 싶었는데 오늘 강연을 통해 요동이론에 관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소개를 받을 수 있었다.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어쨌든 수학을 공부한 사람인 것 같고 그렇다보니 수학을 모르면 접근하기 힘든 것 같다.

오후는 자유라 저마다 어디를 갈까 무엇을 할까하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학회 장소 근처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멀리 창밖으로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있었고 이탈리아풍의 대중가요 같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같이 간 사람들과 주문한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문득 멀리 식당의 창밖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제서야 지금 내가 이곳에 있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나는 일단 숙소로 돌아왔다. 이메일을 확인하니 다음주 에리체에서 열리는 사회동역학 학회에서 이메일이 왔는데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프로그래밍 언어(LISP)를 이용한 실습(?)과 내용을 접해야 해서 긴장이 조금 되는데, 뭐 그렇다고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하여 괜히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안다. 인터넷이 느려서 LISP 설치 파일을 다운받느라 기다려야 했고 설치한다고 또 기다려야 했다.

그러고나니 오후 4시. 마음도 싱숭생숭하여 혼자서 돌아다니기로 했다. 계속 사람들과 같이 다녀서 온전히 혼자서 다니지 못했는데 오늘이 기회다 싶었다. 일요일에 이미 하루종일 여기저기 걸어다녀서 대충 익숙하기는 했는데 오늘 다시 맨 손으로 길을 나섰다. 지난번에 다닐 때 가지 못했던 길들을 주로 골라서 다녔고 또 구석구석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특히 기차역 근처로 가니 어디나 그렇듯 가난과 차별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도 길거리 벽에 붙어있던 공산주의 혁명에 관한 유인물도 볼 수 있었고 그 글을 열심히 읽던 아주머니한테 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대화하기가 어려웠다.) 또 돌아다니다보니 어느새 행사 장소 앞 동네에 와 있었는데 지나치기만 했던 골목 안으로 들어가봤다. 골목 안쪽에는 작은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오후의 뜨거운 햇볕 아래 가게를 지키는 할아버지, 관광을 온 듯한 사람들, 길을 가다 쇼윈도우 앞에서 전자제품을 구경하는 사람들, 시원하게 차려입은 젊은 커플, 그리고 강한 햇볕에 내내 눈살을 찌푸리며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 사람들을 바라보며 터벅터벅 걸어다니는 낙타 한 마리... 뭐 대충 그런 풍경이었다.

다시 숙소 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높게 솟은 건물들 사이로 맛있는 모양의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보였고 그 위로는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이 무심하게 배경을 채우고 있었다.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더욱 많아진 듯 했다. 퇴근 시간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횡단보도 신호등 앞에 그늘진 곳에서 사람들이 반갑게 만나고 있었고 또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같았다. 요즘 할인판매 기간이라 옷가게나 백화점 같은 건물마다 -30%이니 -50%이니 하는 종이가 붙어있었고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또 들어오고 나갔다. 큰 서점에 가서 영어로 씌어진 이탈리아 신문이 없냐고 물으니 파이낸셜 타임즈와 헤럴드 트리뷴, 르몽드를 꺼내어 틱 주고 다시 자기 자리로 가버린다. 숙소 직원도 영어 신문이 있는지 모르겠단다. 뉴스는 봐도 뭔 소린지 모르니 영어로 된 신문이 있으면 이곳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을텐데, 조오금 아쉽다.

하여간 그렇게 두 시간 반을 무작정 걸어다녔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빵조가리 하나 먹지 않았다. 방에 돌아오니 힘이 쭉 빠졌다. 몸이 힘드니 낮에 싱숭생숭했던 마음도 잠시 없어진 것 같았다. 다시 어두운 밤이 찾아왔다. 아무도 없는 호텔 식당 구석에 앉아 있다. 모기들이 문다. 땀을 흘렸는데 아직 씻지 않았다. 몸도 씻고 마음도 씻어야지. 아, 그러고보니 빨래를 어디서 할 수 있는지 물어본다고 해놓고 아직 물어보지 못했다. 기억력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