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저녁 드디어 제노바 학회가 끝났다. 마지막 날은 의욕도 없고 힘들었는데 좀 쉬다가 오후 5시 반에 시작한 마지막 세션은 재미있게 들었다. 학회 전날 저녁 리셉션에서 알게 된 베트남 태생 러시아 학생이 클로징 세션에서 내 옆자리에 앉았다. 다음 24번째 학회에서 만나기를 바란다며 말하고 헤어졌다. StatPhys 24는 호주에서 열리기로 정해졌다. 2010년 7월 19-23일이다. 나도 그때는 더 내공을 쌓아서 중요한 연구를 발표하고 싶다.

마지막 밤이라 아는 분과 맥주 한 잔씩 하고 들어왔다. 좋은 얘기를 많이 들었다. 어제는 새벽 4시 반에 일어났다. 5시에 택시를 불렀고 5시 반에 제노바 공항에 도착. 로마로 가는 7시 비행기가 7시 반쯤 이륙했고 로마에 도착하니 8시 10분 정도... 그런데 시칠리 섬의 팔레르모행 비행기 출발 시간이 8시 45분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와서 게이트를 확인한 후 뛰었다. 잠도 많이 못자고 아침도 못먹은 상태에서 노트북이 든 가방을 들고 뛰려니 욕이 나왔다. (하지만 욕을 하지는 않았다.)

다행히...가 아니라 사실 좀 천천히 와도 되는 것이었다. 다들 그러려니 하며 오더라. 8시 45분 출발이라고 하던 비행기는 교통 체증;;;으로 활주로에서 한 시간은 서 있던 것 같다. 결국 10시 15분이 되어서야 이륙을 한다. 기다리는 동안 답답해서 스튜어드를 불러서 뭐냐고 물으니 몇 분 후에 출발할거라고만 딱 말하고 가버린다. 이번에는 욕이 나왔다. 아무도 듣지 못했지만.

사실 어제 오전부터 에리체 스쿨이 시작되어 오전 세션 중 조금이라도 들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 게 아니었으면 좀 늦어도 상관없다. 게다가 팔레르모 공항에서 에리체까지 픽업해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더 짜증이 났다. 좌석 앞에 꽂혀 있던 항공사 잡지를 보니 한 꼭지가 '느림'에 관한 책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아, 이 항공사 Air One이 언행일치를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나를 기다린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픽업나온 차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더운 여름이었다. 제노바 날씨는 초가을 날씨였는데 역시 지중해 한가운데 이곳의 태양은 강했다. 우리나라 시골 분위기가 났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좀더 사막 같은 분위기지만 여느 농촌이 그렇듯 한적하고 농기계가 곳곳에 서 있는 풍경이었다. 같은 차를 탄 영국 교수가 10년 전에도 이곳에 온 적이 있는데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이 우리 차를 세운다. 에리체 스쿨을 주최하는 쪽에서 고용한 직원이 우리 차의 운전사였는데 이 사람의 자격에 문제가 있었나보다. 같은 차를 탄 베니스에서 온 교수가 경찰과 운전사의 대화를 듣고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속도위반으로 걸린 건 아니고 불시 검문 같은 건데 마침 이 운전사가 걸린 것 같다고 한다. 12시쯤이었는데 40분은 거기 서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 여권까지 보여달라고 했다. 우리는 에리체에서의 첫날밤을 구치소에서 보내는 거 아니냐고 농담했다. 어쨌든 다시 우리는 움직일 수 있었다.

한참을 더 달리더니 차가 점점 언덕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곧 우리 앞에 펼쳐진 광경은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파란 바다였다. 바닷가 근처에 거대한 언덕이 있었고 그 위에 에리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다가 너무 멋져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언덕 꼭대기의 에또레 마요라나 과학문화재단 및 센터에 도착했다. 등록을 하고 호텔을 배정받고 호텔에 가서 짐을 풀었다. 1시 반쯤 되었으려나. 오전 세션은 이미 끝났고 점심시간이 1시부터였다. 오후 세션이 어디서 있는지도 모른채로 일단 밥을 먹으러 갔다. 밥을 빨리 먹고 오후 세션을 들어가야 했다. 그런데 다시 확인하니 오후 세션은 3시부터. 역시 좋구나.했다.

이미 지불한 등록비에는 숙박과 점심, 저녁식사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지정된 여러 식당 중 원하는 곳에 가서 명찰만 내밀면 풀코스로 아무거나 먹을 수 있다. 단 커피, 음료, 와인 등은 따로 돈을 내야 한다. 배가 터지게 먹고 나와서 오후 세션을 찾아갔다. 알고 보니 내 호텔에서 30초 거리였다. 오래된 성당인데 안에 들어가니 대형 스크린과 빠른 무선인터넷이 가능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또 자리마다 마이크가 있어서 편하게 질문할 수도 있다.

발표 하나와 LISP 실습 하나를 듣고 커피 브레이크를 하러 위층에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반대편 벽 하나에 커다랗고 멋진 사진이 걸려있는 줄만 알았는데, 유리도 없이 탁 트인 그쪽으로는 아까 차를 타고 올라오면서 본 그 멋진 광경이 그대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도 커피와 함께! 이쯤에서 사진 하나 올리고 싶지만 디카 사진을 다운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아쉽다. 세상에 이런 커피 브레이크가 있을 수 있다니! 한동안 넋을 놓고 바라보다 커피도 한 잔 하고 사진도 좀 찍고 오후 세션을 마저 들었다.

에리체 스쿨은 세 분야의 참가자들이 모인 것이다: 언어학자, 프로그래머(컴퓨터공학자보다 이 말이 더 자연스럽다), 통계물리학자. 아마도 주요한 초점은 언어의 발현과 진화인 듯 하다. 어제 차를 같이 타고 온 베니스의 교수는 실험경제학을 하는 사람이고 언어의 발현에 관한 연구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오전까지 진행될 프로그램은 비언어학자를 위한 언어학 강의, 비프로그래머를 위한 프로그램 강의(LISP), 비물리학자를 위한 복잡계 강의로 이루어져 있다. 오후 세션의 복잡계 강의는 연결망 이론에 대한 소개였고 조금 아는 내용이라 나는 노트북을 꺼내서 혼자 LISP 실습을 했다. 한두 시간 공부한 게 전부지만 재미있더라.

호텔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모텔보다 못한 것 같은데 한 가족이 운영하는 것 같은데 좀 불친절하다. 특히 그 집안 딸인 것 같은 사람은 시종일관 무뚝뚝한 얼굴로 이탈리아어로만 말한다. 어쩌라는 거냐;; 그래도 나름 관광지이고 외국인들도 많이 찾아올텐데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는건가 싶기도 하고, 뭐 그게 그냥 여기 사람들의 스타일이려니 하기도 한다. 그보다 안타까운 것은 호텔에서 인터넷이 안된다는 것. 이런 사소한 몇가지를 빼면 돈도 많이 안들고 경치도 좋고 학회 시설도 괜찮고 하여간 일단 맘에 든다.

발표나 강연이야 들으면 되는 거고, LISP를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고, 수요일에 포스터 발표를 하는데 발표 전날 쯤 다시 생각을 정리하면 될 것 같다. 나름 관광지라 좁은 동네여도 기념품 파는 가게들이 꽤 있는데 떠나기 전날이나 떠나는 날이나 쇼핑이나 할까 하는 생각이 있다. 지금 이곳은 에또레 마요라나 센터의 전산실인데 인터넷을 하려고 아침 먹고 8시 반쯤 왔을 때만 해도 나 혼자였는데 지금은 열명쯤 되는 사람들이 다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나저나 피곤해서 그런지 입안에 혓바늘이 돋았는데 나아질 생각을 안한다. 어제도 밤 10시에 누워서 9시간이나 잤는데도 말이다. 하여간 20분 후면 또 오늘의 세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시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성당으로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