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만남에 관한 약속은 시공간 위의 특정한 영역에 대해 이루어진다. 공간과 시간을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우리의 몸 자체가 0보다 큰 일정한 부피를 갖고 있으므로 약속공간('약속장소'가 더 일상적인 표현이다)은 최소한 우리 몸의 부피보다 큰 영역으로 설정된다. 이를테면 어디어디 버스정류장 앞, 어떤 거리의 어떤 음식점 따위로 표현된다.

하지만 시간에 대해서는 다르다. 물론 경우에 따라 '3시부터 3시 10분 사이에 보자'는 식으로 특정한 점이 아니라 일정한 구간으로 약속시간을 정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3시 정각' 같은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이렇게 약속시각(시간은 구간을, 시각은 점을 의미한다)을 잡으면 이 약속시각을 지키기가 어렵다. 여기서 약속시각을 지킨다.고 할 때 미리 오거나 늦게 오는 상황을 배제하자. 딱 그 시각에 맞춰오는 것만을 '약속시각을 지킨다'라고 부른다면 약속시각을 지키기 어려운 이유는 명확해진다.

쉽게 말해서 0과 1 사이의 실수 하나를 미리 정한 후에 0과 1 사이의 랜덤한 실수를 하나 골랐을 때 그 수가 앞에서 정한 수와 같을 확률은 0이다. 약속시각을 3시 정각으로 해놓았을 경우 3시 정각이 되는 순간에 바로 그 약속공간에 나타날 확률은 0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약속시각 10초 전에 약속공간으로부터 5초가 걸리는 거리에 와 있다가 5초 동안 제자리에서 기다린 후에 나머지 5초 동안 약속공간에 간다면 약속시각을 지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움직임이나 걷는 속도 등에 0보다 큰 오차가 나타날 확률이 매우 크므로 정확히 약속시각을 지키는 일은 여전히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약속시각을 칼 같이 정확히 지키는 일이 매우 드물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또한 미리 오는 경우에 비해 늦게 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그 사회나 문화에 따라 이 늦어지는 정도가 다르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약속시각을 정확히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요즘은 조금 게을러져서 조금씩 늦는 편이다. 그래서 예전에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면서 왜 사람들은 늦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고 그 이유를 생각하다보니 이런 글을 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