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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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블로그에서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보았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다. 힐베르트라는 이름은 물리학에도 자주 등장해서 익숙했지만 그의 생애와 그가 이룩한 업적들에 대해서는 사실 아는 바가 없었다. <수학자, 컴퓨터를 만들다>를 다 읽고 곧바로 콘스탄스 리드의 힐베르트 전기 <현대 수학의 아버지 힐베르트(원제: Hilbert)>를 집어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에서야 다 보았다.

수학에 대해 잘 몰라서 그가 이룩한 업적에 대한 소개는 피상적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불변식, <기하학의 기초>, 수론, 초수학, 공리체계, 직관주의에 대한 반대, 적분방정식, 물리학... 특히 수학의 공리체계의 완비성, 무모순성, 독립성 등을 정리하고 수학의 확고한 기초를 다지고자 했던 그의 정신은 그의 이마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나는 듯 했다. 또한 그가 은퇴 후 자신의 고향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명예시민이 된 후 했던 연설(1930년 가을)의 마지막 말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해 겨울에 괴델이 자신의 불완전성 정리에 관한 논문을 저널에 제출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힐베르트의 원대한 이상은 타격을 받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그의 정신은 살아있는 듯 하다.

그의 공리체계와 정신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괴팅겐의 학문적 분위기였다. 물론 그 중심에는 펠릭스 클라인, 다비드 힐베르트가 있었으며 특히 젊은이들에게도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고 영감을 불어넣었던 힐베르트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인종, 성별, 국적에 상관없이 학생들을 지도하고 젊은 학자들을 영입하여 연구할 수 있게 했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일화는 여성 수학자인 에미 뇌터에 관한 것이다. 그녀가 박사학위자에게 주는 자리인 사강사(프리바트도첸트) 자리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하려 하자, 힐베르트는 "학회는 목욕탕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그녀에게 자리를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힐베르트는 젊었을 때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그의 스승인 후르비츠와 친구인 민코프스키와 함께 매주 산책을 하며 수학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괴팅겐에서도 그렇게 자유로운 토론의 장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노력들이 20세기 초에 괴팅겐을 수학의 중심으로 만들어놓았고 젊고 뛰어난 사람들은 힐베르트를 만나기 위해 괴팅겐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재작년 가을, 학회가 끝나고 혼자 잠시 여행을 하며 괴팅겐을 마지막으로 들렸는데, 백년 전 그곳에 대해 더 알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좋은 시절도 1,2차 세계대전에 의해 빛을 잃기 시작한다. 특히 나치가 정권을 잡고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면서 수많은 학자들과 학생들이 독일을 떠나 미국 등으로 자리를 옮긴다. 힐베르트는 "괴팅겐의 수학계에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며 불평을 한다. 그리고 아직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43년에 82세의 나이로 그의 화려했던 생애에 비하면 초라하게 생을 마감한다.

지금 이곳에서 나는 어떠한가.와 같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먼지 일듯 일어나지만 다시 마음을 잡고 공부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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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쓸 때나 지금이나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음을 잡고 공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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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9월 18일 오전 9시 46분, daewonyoon님의 지적에 따라 다'비드' 힐베르트, 프리'바'트도'첸'트로 바꾸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