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또 SOC를 사회간접자본으로 알고 들어오신 분들께는 죄송하다는 말씀을...

SOC는 self-organized criticality를 뜻하며 우리말로는 '자기조직화 임계성' 또는 '스스로 짜여진 고비성'이라고 한다. 모래쌓기 모형의 경우 모래더미에 모래알을 한 알 떨어뜨린 후 사태가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모래알을 떨어뜨린다. 사태 크기의 분포가 거듭제곱 법칙을 따른다고 하여 임계성(criticality)이고 또한 다른 조절변수를 조절하지 않아도 시스템이 알아서 임계성으로 끌려들어간다고 하여 자기조직화라는 말이 붙었다.

하지만 모래쌓기 모형의 규칙 중 '사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다'는 조건이 이미 잘 조절된 조절변수라는 것이 명백하다. 물론 규칙에 그러한 변수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내재되어 있는 것일 뿐 조절변수의 조절이라는 면에서 '자기조직화'라는 말은 부적절하다. 어쨌든간에 다른 글에서 나는 SOC를 다시 정의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정의로부터도 '자기조직화'라는 말이 정당화되지 않는다.

그럼 이건 어떨까? 모래알을 사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아무렇게나 뿌려대는 것이다. 이런 연구도 누군가가 분명히 했음직한데 찾아보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뿌린다는 것은 동시에 두 모래알을 여기저기에 떨어뜨릴 수도 있고 하나의 사태가 끝나지 않았는데 그 위에 모래를 뿌려서 사태를 더 키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시스템이 아벨리안 모래쌓기 모형이라면 각 모래알로부터 촉발된 사태들 사이에는 아벨리안 성질이 만족되므로 이미 모래 한 알에 의한 사태 크기의 분포가 주어져 있다면 이 분포들을 잘 이용해서 아무렇게나 떨어뜨린 경우의 사태 크기 분포를 계산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래알이 너무 자주 떨어져서 사태가 끊이지 않는다면 아예 '사태'를 따로 정의하지 않고 매 순간 무너진 모래알의 개수로 시스템의 활동성을 새로 정의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지진, 눈사태 같은 실제 현상에서는 모래알을 쌓는 시간규모와 그렇게 쌓인 모래알이 한꺼번에 무너지는(사태) 시간규모가 큰 차이가 나므로 모래쌓기 모형이 간단한 좋은 모형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한 시간규모의 분리가 명확하지 않은 현상에서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특히 사회현상 중에서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는 정치를 보면 늘 어디선가 새로운 모래알이 튀어나와 때로는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오고 때로는 반짝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종종 여러 사건들이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경우, 또는 한 사건이 마무리되는 것 같다가도 다시 새로운 사건에 의해 불이 붙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에는 앞서 말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

이래저래 SOC라는 말에 '자기조직화'가 붙는 것은 여전히 부적절해보인다. 그냥 '비평형 임계성(nonequilibrium criticality)'이라 부르는 게 포괄적이면서도 안전하고 또 '평형 임계성'과 분명히 구분되므로 더 낫다는 생각이다. 다만 시간규모가 잘 분리된 자연현상의 경우에 그걸 '자기조직화'라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적어도 누군가가 일부러 시간규모를 분리시켰다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된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형에서는 시간규모를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으면 '사태'에 대한 정의가 모호해지므로 엄격한 분리는 필수적이고 이는 곧 조절변수의 조절에 해당한다. 문제는 자연현상의 시간규모 분리를 설명하지 않은채 이를 전제로 한 모형을 세운데 있다. 음... 더 생각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