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정말 SOC인가?'라는 글에 이어지는 글이다. SOC의 앞 두 글자에 해당하는 '자기조직화'가 정말 맞으려면 자연현상에서 발견되는 시간규모 분리를 그냥 받아들여서 모형을 만드는 대신 이를 설명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기 위한 시도 중 하나로서 시간규모 분리라는 가정을 완화해도 임계성이 나타나는가를 보면 된다.

모래쌓기 모형에서 모래알 하나에 의해 촉발된 사태가 끝나기를 기다린 후 새 모래알을 떨어뜨리는 것은, 모래알을 떨어뜨리는(입력) 시간규모가 모래더미의 사태(출력)의 시간규모보다 매우 크다는 가정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끝나기도 전에 다른 모래알을 떨어뜨리는 모형, 이른바 달리는 모래쌓기 모형(running sandpile model)이 이미 1992년에 Hwa와 Kardar의 논문에서 제시되었다.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에 가깝다. 시간규모 분리를 엄격히 지키지 않아도 임계성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원조 모래쌓기 모형과의 차이점은 말했듯이 한 번에 모래알을 여러개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매 시각 t마다 각 자리(site)에 모래알을 하나 떨어뜨릴 확률을 p로 준다. 원조 모래쌓기 모형의 규칙(사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떨어뜨리기)은 p를 0에 가까운 극한값으로 주는데, 여기서는 p를 유한한 값(이 논문에서는 0.001부터 0.00001까지 변화시킨다)으로 주므로 여전히 어느 정도 시간규모가 분리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만 0이냐 아니냐라는 분명한 차이를 갖는다.

다만 앞에 쓴 글에서도 밝혔듯이 사태 하나를 잘 정의하기가 힘들어지므로 대신에 시각 t에서의 활동적인 자리의 개수(즉 그 자리에서의 모래더미 높이가 문턱값을 넘을 때, 그 자리들의 총 개수)를 시간에 따라 세어서 그 시계열을 분석한다. 이 시계열의 파워 스펙트럼(power spectrum)을 구해봄으로써 오히려 모래알을 더 많이 떨어뜨릴수록 1/f 잡음의 영역이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모형에서는 사태크기의 분포가 거듭제곱 법칙을 따르는 것을 봤고 이로부터 사태크기의 시계열이 1/f 잡음을 보여준다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달리는 모래쌓기 모형에서도 p를 유한한 값이 아니라 0에 가까운 극한값을 주면 1/f 잡음이 나와야 할 것 같은데, 시뮬레이션 결과 1/f^4이 나와서 1/f는 아니다. 모래알을 한꺼번에 여러개 떨어뜨리고 또 이들에 의한 사태들이 겹쳐져야만(avalanche overlap) 1/f 잡음이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사태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시스템의 상관(correlation)이 더 높아진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결론은, 시간규모를 엄격하게 분리하지 않아도, 즉 시스템의 조절변수를 미세조정하지 않아도, 즉 시간규모 분리를 보장하는 외부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임계성이 나타나므로 일단은 자기조직화 임계성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모형을 세우면서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가정들을 모두 검토해보아야만 그때에서야 비로소 '자기조직화'라는 말을 쓸 수 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여간 말 한 번 잘못 붙였다가 많은 사람들 머리 아프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비평형 임계성'이라는 말을 쓰자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