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지금까지 주로 해온 일들은 어떤 현상에 대한 모형을 세우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수식을 세워서 풀어내고 그 결과가 정확한 결과, 즉 어떠한 어림(approximation)도 하지 않은 결과가 아닌 경우에는 수치계산을 통해 어림이 정당화되는지를 파악하고 맞춰보는 일을 해왔다.

대개의 경우 정확한 해(exact solution)를 얻는 것은 힘든 일인데 모형이 복잡해질수록 더욱 그렇다. 아니면 그만큼 수학이 뒷받침을 해주면 문제 없을테고. 정확한 해를 구하기 힘든 경우에는 복잡한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는 핵심적인 원리를 잡아내야 한다. 단순한 계산이 아닌 '물리적 원인'을 밝혀내야 하며 이를 흔히 '물리' 또는 '피직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엄청난 분량의 계산을 해놓고도 결과가 뻔하다거나 또는 별 의미 없는 경우도 있는데 당연히 그 연구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다. 관련된 내용으로, 고율님의 벨만에 관한 최근 글에서 두어 문장을 (허락 없이) 옮겨왔다.

새로운 방정식의 대부분은 의미가 없고, 따라서 어려우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빠지게 된다. 비슷하게, 세상에는 대답하기 어려우면서 연구할 가치가 없는 문제들이 많이 있다. 잘 훈련된 수학자는 문제의 가치를 다루기 어려운 정도에만 의존하여 평가해서는 안된다.
- 동적 계획의 탄생에 대한 리처드 벨만의 이야기 (3)

내가 요즘 하고 있는 모래쌓기 모형이 사실 좋은 사례가 된다. 모형은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그 모형에 담겨 있는 의미와 범위가 매우 커서 아직까지도 할 일이 많은 분야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수학적으로 단순하지는 않다. 2차원 방향성 없는 모래쌓기 모형의 정확한 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특히 임계지수의 '정확한 해'로 알려진 것들도 잘 알려진 통계적 특성을 통해서 유추되었을 뿐 모래알 각각의 운동을 모두 정확하게 기술한 결과는 아니다.

그렇다면 복잡한 현상으로부터 어떻게 핵심적인 원리를 포착할 수 있는가가 관건인데 이를 위해 시늉내기가 도움이 될 것이다. 모형의 규칙은 주어져 있으므로 그 규칙에 따른 시늉내기를 하고 통계적인 양들을 측정해봄으로써 그 모형에 숨겨져 있는 특성들을 파악할 수 있다.

어쨌든 나의 경우에는 시늉내기를 감상하면서 그 원리를 파악해내야 하는데 모형의 이해와 해석보다는 '패턴이 이쁘군'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상에만 치중하게 된다. 그래서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게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동기이다. 오래전에 연구실 선배도 비슷한 얘기를 해주신 적이 있다. 모형의 결과를 머리 속으로 생각해보기 이전에 컴퓨터 프로그램부터 짜려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었다.

아직까지 컴퓨터는 계산의 도구이지 사람의 생각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그런데 시늉내기 결과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컴퓨터가 생각까지 해줄 것처럼 대하는 나를 발견한다. 결론은 열심히 생각하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