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한 구석에 넣어두었던 주제가 논문을 읽다 잠시 쉬는 틈을 타서 표면 위로 떠올랐다. 양자역학과 통계역학의 관계에 대한 것인데 더 간단히 말하자면 '확률과 통계의 관계'다. 지금부터 내가 쓰는 용어들은 기존의 정의와 살짝 다를 수도 있다;;

동전이 하나 있다고 하자. 그걸 100번 던졌더니 47번은 앞면, 53번은 뒷면이 나왔다. 이 상황을 통계적으로 기술하면, "100번 던지면, 앞면 47번, 뒷면 53번"이다. 이 상황을 확률적으로 기술하면 "한 번 던지면, 앞면은 0.47번, 뒷면은 0.53번"이다. 두 기술의 차이점은 사건 하나에 대한 것이냐(확률), 여러 사건들에 대한 것이냐(통계)에 있다.

우리의 일상 경험에서 동전을 한 번 던지면 앞면 아니면 뒷면이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험을 잘 분류하고 개수를 셈으로써 '구체적인' 통계가 구성되며 이로부터 얻어진 확률은 보다 '추상적인' 개념일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의 구체적 사실'들'(통계)로부터 '미래'의 '한' 사건(확률)을 예측한다는 도식을 그려볼 수 있다.

어쨌든, 모두 N개의 사건에서 앞면이 나온 사건의 개수를 n이라고 하면 앞면이 나올 확률은 n/N이다. 즉 확률과 통계는 N으로 나누어주느냐 아니냐로 구별할 수 있다. 이 차이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역학과 통계역학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양자역학에서 '하나'의 입자가 어느 위치 x에 있을 것인가를 '확률적'으로 기술하는데, 그게 바로 파동함수이며 f(x)로 표시하자. 물론 상호작용하는 여러 입자들의 위치를 기술하는 파동함수도 있지만 우선 '하나'의 입자에 대해서만 보자. f(x)에 어떤 자연수 N을 곱한 N f(x)는 N개의 입자들의 통계적 분포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통계역학이 된다.

즉, 양자역학에서 입자 하나의 확률분포는 통계역학에서 N개의 입자의 통계분포(사실 이것도 그냥 확률분포라고 부르기도 한다)이며, 입자 하나에 대한 양자역학은 입자 N개에 대한 통계역학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다시 말해서 시스템의 차원이 하나 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새로운 차원의 길이는 N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d 차원의 양자역학은 d+1 차원의 통계역학과 같다"는 피셔 할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1차원 이징 스핀 모형을 전달 행렬(transfer matrix; 넘김 행렬) 방법으로 풀면 1차원 위의 스핀 N개 짜리 문제가 1개 짜리 문제로 환원된다.

입자의 개수를 N으로 늘리기만 한다고 해서 그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고려되는 것은 아니므로 위의 주장은 제한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나도 일반적인 반론을 제시하기는 힘들지만 위의 예로 든 1차원 이징 스핀 모형의 경우 상호작용하는 N개의 스핀들이 1개의 스핀에 관한 문제로 환원되므로 위의 주장이 제한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한 가지 짚을 점은, 양자역학적 실체에 관한 것이다. 동전을 던지면 어떤 면이 나올까는 고전적으로는 동전을 이루는 입자들에 관한 초기조건과 운동방정식을 풀어서 '정확히' 얻어낼 수도 있다. (혼돈 이론에 의한 반론도 가능하다;;) 하지만 양자역학적으로 각각의 입자가 확률적으로 분포하므로 운동방정식을 풀어서 얻은 결과 역시 확률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입자 각각에 대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인정한다면 '확률'은 더이상 통계로부터 얻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실체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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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맥락으로, 파동함수의 운동방정식인 슈뢰딩거 방정식(Schroedinger equation)은 통계역학에서 확률분포의 변화를 기술하는 포커-플랑크 방정식(Fokker-Planck equation)과도 닮아 있다... 이건 나중에 더 생각해보고 정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