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주제로 오고간 이야기들을 보았습니다. 특히 Alan님(앞으로 그냥 '앨런님'으로 쓸게요;;)은 자신의 글에서 결정론자가 보는 자유의지를 논하면서 여기에 결정론적 자유의지라는 말을 붙이셨습니다.

앨런님은 '우리가 진실로 알 수 있는 것이란 없다'는 불가지론에서 출발하시는 것 같습니다. 또한 '결정론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믿'는다고 하시면서도 결정론을 '충분히 합리적인 철학적 입장'으로 생각하며 '더 경제적'이므로 선호한다고 하십니다. '결정론적 세계'를 받아들이더라도 인간은 '착각/환상'으로서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이를 '결정론적 자유의지'로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불가지론을 믿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지닌 다음과 같은 한계들 때문입니다.

1. 인간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인식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2. 인식된 정보로부터 세계에 대한 모형을 구성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3. 모형을 계산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4. 결론적으로 현상을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런데 그보다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르네요.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의 인식은 완전하며 적어도 위의 1번 한계는 부정되어야겠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다면 1번 한계는 정당화됩니다. 애초에 논의의 범위와 층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해서 생각이 제멋대로 날아다니네요;;;

다시 좀더 현실적인(?) 세계로 돌아오겠습니다. 불가지론자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세계에 대한 완벽한 지식/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지 세계에 대한 지식/이해가 전혀 불가능하다는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 동의한다면 인식의 한계 내에서 인식된 정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하는 다음 문제로 넘어갈 수 있겠죠. 그 처리에 관한 철학적 입장으로 결정론을 말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저는 세계를 이루는 기본 입자들이 결정론적인 물리학의 법칙을 따른다면 세계는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물리법칙의 존재여부를 떠나서 결정론을 받아들이느냐라고 묻는다면 그렇게 나이브하게 생각할 문제는 아닌 듯 합니다. 수많은 우연적 요인에 영향받아온 인간으로서 결정론은 그렇게 만만한(?) 입장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떤 형태든 인식론적인 도약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만만한(?) 물리법칙을 끌어다가 그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보겠습니다.

사실 물리법칙은 보편성을 추구해왔고 또한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으나 여전히 극히 제한된 현상들에 대해서만 '법칙'일 뿐 그보다 복잡한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는데는 역시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세계는 근본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하고 그 입자들이 결정론적인 물리법칙을 따른다면 세계는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저 역시 받아들입니다.

앨런님은 이러한 결정론에 대한 두 가지 반론에 대한 반론을 역시 자신의 글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양자역학에 근거한 결정론에 대한 반론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가 결정론을 부정한다는 얘기일 겁니다. 이에 대한 제 생각은 앨런님 글의 덧글에도 썼듯이 입자 각각의 불확정성을 인정하더라도 입자의 확률분포는 결정론적 물리법칙(이를테면 슈뢰딩거 방정식은 확률분포의 변화를 기술하는 결정론적인 운동방정식입니다.)을 따르며 이렇게 한발 물러서더라도 결정론은 유지된다고 생각합니다.

또다른 반론은 혼돈이론에 근거한 것으로서 흔히 '초기조건에의 민감한 반응성(나비효과)'이라는 성질을 근거로 예측불가능성이 주장되곤 합니다. 이에 대해서도 우리가 세계에 대한 완벽한 정보를 갖고 있고 세계의 운동법칙을 완벽하게 안다면 미래는 여전히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다는 답변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나비효과는 두 가지 다른 초기조건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결과가 나오는데 초기조건이 '비슷'하더라도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이지, 같은 초기조건에 대해 두 가지 다른 결과가 나온다고 말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의는 제가 쓴 '예측가능성'을 참고.)

일단 여기까지 쓰고요, 이제 다음 글에서 본격적으로 자유의지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