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 박(Per Bak; 정확한 발음 모름;;)이 모래쌓기 모형을 제시하면서 '자기조직화임계성(SOC)'이라는 말을 쓴 이후로 '자기조직화'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박과 탕, 비센펠트가 그들의 기념비적인 논문에서 제시한 SOC를 보여주는 모래쌓기 모형(저자들 이름의 첫글자를 따서 BTW라고 부른다. 웬지 '박탄비 모형'로 부르고 싶어지는 1인...)에는 '숨겨진 조절변수'가 있으며 그 조절변수가 이미 잘 조정되어 있기 때문에 임계성이 나타나는 것이지 '저절로' 되는 건 아니라는 주장에 나도 동의한다. 그래서 앞으로 '자기조직화'라는 말에는 따옴표를 붙이겠다.

이런 관점에서 '자기조직화' 모래쌓기 모형을 기존의 비평형 통계물리의 다른 연구분야와 연관짓고 더 넓은 맥락속에 위치지으려는 시도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세 가지를 소개한다. (사실 이 세 가지밖에 모른다;;)

1) 몰리고 흩어지는 모래쌓기(driven-dissipative sandpile; DS)

원조 BTW 모형에는 외부에서 시스템을 몰아가는(driving) 시간규모와 그로 인해 에너지가 풀리고(relaxation) 흩어지는(dissipation) 시간규모 사이의 분리가 모형에 내재되어 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이 쌓이는 건 알게모르게 조금씩이지만 그게 문턱값을 넘어 화가 나고 싸움이 생기는 건 한순간인데, 이런 인생살이도 다 DS 모형으로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을까?;;

그래서 DS는 이렇게 '내재되어 있는 조절변수'를 명시적으로 표현하여 일반화하고 그 조절변수가 특정한 값(즉 임계점)일 때에만 임계현상이 나타난다고 해석함으로써 '자기조직화'라는 모호한 껍질을 벗겨낸다. 이 방법이 모든 것을 명쾌하게 해결해주기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세한 건 지금까지 다뤘거나 나중에 쓰기로 하고 넘어가자. 어쨌든 원조 BTW 모형은 일반화된 DS의 조절변수를 임계점 근처로 조정한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 '풀리고 흩어지는 모래쌓기'라는 말은 여러 논문에서 쓰고 있는데 DS라는 약자는 편의상 내가 처음 붙여봤다.

2) 고정에너지 모래쌓기(fixed energy sandpile; FES)

에너지가 고정된 모래쌓기 모형이라는 말이다. 역시 원조 BTW를 비롯한 많은 모래쌓기 모형을 보면 '열린계(open system)'이다. 모래알이 하늘(시스템 밖)에서 떨어져내리고 시스템 안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시스템 밖으로 굴러가버리는 시스템인데, 여기서는 모래알의 총 개수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생각해보면 내가 석사논문으로 모래쌓기 모형에 대해 쓰면서 열린계와 닫힌계를 모두 고려했었다. 그게 2000년이었는데 바로 그 비슷한 시기(1998~2000년)에 지금 소개하는 FES가 제시되었고 그걸 이제야 알았다;; 하지만 난 그냥 일반적인 경우를 고려하려고 했을 뿐 기존의 상전이라는 틀에서 재해석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임계성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도 상전이가 뭔지도 잘 몰랐더랬다. 그냥 모형이 직관적으로 흥미로웠고 여러 가지를 연습해보는 기회였다.)

잡소리가 길어졌다. FES는 통계쪽에서 유명한 Vespignani를 비롯하여 Dickman, Munoz, Zapperi 등이 제시한 개념으로서 모래알의 총량을 조절변수로 쓴다. 처음에 랜덤하게 모래알을 뿌려놓고 다 무너져서 안정한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거다. 만일 모래가 적었으면 금방 안정한 상태가 되고 더이상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한번 그런 상태에 빠지면 더이상 변하지 않는다고 하여 흡수상태(absorbing state)라 부른다. 모래가 많았다면 무너지는 일도 많이 일어나고 이게 서로서로 영향을 미쳐서 영원히 안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걸 활동상태(active state)라 부른다. 그래서 흡수상태와 활동상태를 질적으로 구분짓는 경계, 즉 임계점이 정의되고 흡수상전이라는 틀로 모래쌓기 모형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FES가 개념적으로 처음 나온게 말했듯이 10년 전인데 아직도 시늉내기 결과조차 논란이 많다. 위에 말한 베스피냐니 등이 쓴 논문에서도 같은 저자들이 2년 새에 말을 바꾸기도 하는 등, 이걸 공부하면서 나도 너무 혼란스러웠다. 시늉내기가 가장 먼저 쉽게 해볼 수 있는 일인데 이것조차도 잘 안되는 모양이다. 게다가 평균장 어림을 이용한 논리전개로는 한계가 있고 정확히 푸는 것 역시 쉬워보이지 않는다. (쉬웠다면 벌써 다 해버렸겠지;;) 재작년에서야 1차원 결정론적 FES의 정확한 해를 구한 논문이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출판되었다.

3) 들러붙는 모래쌓기(sticky sandpile; SS)

이건 '들러붙는 알갱이의 모래쌓기 모형(sandpile model with sticky grains)'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데 역시 내맘대로 SS라고 줄여서 부르겠다. 모래쌓기 모형의 정확한 풀이에 그 누구보다도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 디팍 다(Deepak Dhar)가 공동연구한 모형이다. 모래더미의 기울기가 너무 가파르면 모래알이 굴러내려야 하는데 굴러내리지 않고 그 자리에 '들러붙을 확률'을 도입한다. 그리고 굴러내린다고 해도 굴러내리다 바람에 날려 시스템 밖으로 빠져나갈 확률(흩어지기 확률)도 도입한다. 이 두 조절변수에 의한 상전이를 볼 수 있고 우리가 '조절할 수 있다'는 면에서 '자기조직화'는 아니다.

이 모형에 대해서는 아직도 좀 모호한데가 있어서 더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어쨌든 이들의 주장은 위의 모형들과는 다른 뭔가 새로운 내용이다. SS는 FES와 달리 DS처럼 열린계이며, 방향성 있는 무너지기 규칙인 경우 흩어지기 확률이 0으로 가는 극한에서 잘 알려진 흡수상전이 모형으로 정확히 본뜨기(mapping)된다. 그래서 임계점에서 나타나는 거듭제곱 꼴이 흡수상전이의 DP(directed percolation) 분류와 같다. 하지만 방향성 없는 경우는 시늉내기로는 역시 DP라는 걸 보였는데 이에 대해 보나첼라(Bonachela) 등이 방향성 없는 경우는 DP가 아니라 C-DP라는 반박을 했다. 이에 대한 다(Dhar) 그룹의 반론이 작년에 <피지카 A>에 실렸는데 웬지 궁색하고 핀트도 좀 안맞는 것 같아서 신뢰가 가지 않는다.

지금까지 소개한 세 가지 외에도 자기조직하지 않는 모래쌓기 모형에 관한 다른 접근방법도 가능할 것 같다. 그리고 알려진 모형들에서도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나마 셋 중 FES가 가장 잘 정의된 모형 같아 보이는데 정확한 해를 구했다는 논문을 (나중에) 봐야겠다.

이쯤에서 나는 모래쌓기 모형에 '자기조직화'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지양하려고 한다. 적어도 모래쌓기 모형은 저절로 임계상태에 가지 않는다. 실제 모래쌓기 현상에서도 임계상태는 나타나지 않고, 쌀쌓기 실험에서는 나타난다. 그렇다고 해도 모래쌓기 '모형'은 엄밀하게는 자기조직화가 아니다.

역시 SOC 모형으로 잘 알려진 박-스네픈 진화 모형(Bak-Sneppen evolution model; BS model)은 또 다르다. 모래쌓기와 달리 문턱값은 미리 설정되지 않는데도 알아서 형성되고, 모래쌓기 모형의 시간규모 분리도 모형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암시적으로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역시 해석의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SOC가 되는 자격조건은 모래쌓기 모형보다는 나아보이는데, BS 모형도 흡수상전이, 표면 성장 연구와 연관지으려는 시도들이 있었으므로 그런 걸 더 봐야 판단내릴 수 있을 듯 하다.

한 2주일 정도 낑낑대며 공부하고 고민한 결과를 간략히(?) 정리했다.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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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월 12일 오후 4시 44분 덧붙임
이글에 관한 참고문헌들을 정리하여 '물리저널읽기'에 쓴 글을 트랙백으로 걸어놓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