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진화심리학에 대한 재미있는 발표를 들었는데 궁금한 것들이 있었다. 잊고 있었는데 오늘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우선 스티븐 핑커가 쓴 책의 이름이기도 한 빈 서판(blank slate)은 라틴어로 tabular rasa이다. 한국 위키피디아에서 이걸 찾다가 외부 링크로 걸려 있던 크리스 콜비의 "진화생물학 입문"이라는 번역글을 읽어보았다. 원래 글은 여기서 볼 수 있다. (영어 원문은 version 2임.) 이 글을 읽고나니 몇 가지 궁금증이 풀렸다. 일단 내멋대로 내 생각을 덧붙여서 주욱 정리해보겠다.

진화는 유전자 집합의 변화이다. 간단명료한 정의다. 유전자는 생물체의 형질에 관련된 인자로서 세포 내 염색체의 DNA 배열 방식이며 간단히 유전 정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유전자 집합이란 말 그대로 유전자들의 집합이다. 종(species)은 그러한 유전자 집합으로 정의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유전자 집합은 서로 다른 종으로 구분될 수 있다.

유전자 집합을 어떻게 특징지을 수 있나. 우선 집합의 크기, 즉 유전자의 개수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대립형질의 다양성이 있다. 대립형질이란 한 유전자의 서로 다른 버전이다. 이를테면 코스 요리를 시키는데 후식으로 커피, 녹차, 사이다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후식 유전자'의 대립형질의 개수는 3개가 된다. 이런 식으로 전채 요리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어떤 전채에 대해서는 어떤 후식이 많이 선택되는 경향이 존재할 수도 있고 전채의 선택과 후식의 선택이 완전히 독립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걸 대립형질의 비임의적 결합이라 부르며, 대립형질의 다양성과 함께 유전적 변이(genetic variation)를 이룬다.

진화, 즉 유전자 집합의 변화는 유전적 변이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변하는가? 유전적 변이는 줄어들 수도 있고 늘어날 수도 있다. 줄어드는 메커니즘으로는 자연선택(성선택 포함)과 유전자 표류(genetic drift)가 있으며 늘어나는 메커니즘으로는 돌연변이(mutation), 재조합, 유전자 이동(genetic flow)이 있다.

자연선택은 말 그대로 특정한 유전자 또는 유전자 집합이 자연적으로 선택된다는 말인데 이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한다. 여기서 '선택'은 누군가의 의도적 판단이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나 종에게 이로운(beneficial) 유전적 변화가 선호되는 '효과'일 뿐이라고 한다. '선택 압력'이라는 말도 특정한 목적이나 방향으로 가해지는 힘이 아니라 생물학자들이 쓰는 일종의 시적 표현이라고 한다.

말하려는 의도는 알겠는데 '이롭다'의 기준이 무엇이냐라고 묻고 싶다. 어떠한 유전적 변화가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살아남았는지 아닌지가 그 답이라면 동어반복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고 살아남았느냐가 아니라고 해도 판단하기 매우 어려울 것 같다. 글쓴이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진화론에 관한 오해라며 분명히 선을 긋지만, 선택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에 명쾌한 답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유전자 표류는 자연선택보다는 더 중립적인 설명인 것 같다. 한 세대의 유전자 집합은 다음 세대에 유전되는데 통째로 몽땅 전해지지 않으며 일종의 샘플링 과정을 거친다. 번식하지 못하고 죽는 개체도 있고 자손을 남들보다 더 많이 남기는 개체도 있으므로 세대가 지나면서 어떤 대립형질은 다른 대립형질보다 더 많이 살아남아 언젠가는 소수의 대립형질이 사라질 수도 있다. 이 글에도 나오는 예인데, 빨간 구슬 50개와 파란 구슬 50개가 있다고 하자. 모두 100개의 구슬 중 10개만 '무작위로' 뽑고 나머지는 모두 없앤 후에 10개의 구슬을 각각 같은 색깔로 10배씩 늘려서 다시 100개의 구슬을 만든다. 뽑힌 10개의 구슬이 5:5일 가능성이 제일 크기는 하지만 4:6 또는 3:7일 가능성도 그렇게 낮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유전자의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자연선택은 생물체의 입장에서 보면 수동적인 의미에서나마 '적응'이라는 개념이 쓰일 수 있는데 반해 유전자 표류는 무작위 과정이므로 어쩌면 진화에 대한 더 경제적이면서 깔끔한 설명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생물학자들이 자연선택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 같다.

유전적 변이가 늘어나는 메커니즘 중 돌연변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정보의 불확실성이 늘어남으로써 정형화된 패턴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이동은 한 종의 유전자가 다른 종으로 퍼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한 유전자 집합의 원소가 다른 집합으로 복제된다고 보면 된다.

'유전자' 관점에서 본 미시적 진화, 즉 소진화에 대한 설명은 대충 여기까지다. 이러한 소진화로부터 어떻게 대진화가 나타나는가도 논란거리인 듯 하다. 여기에는 전통적인 점진주의 입장이 하나 있고, 스티븐 제이 굴드에 의해 제창된 중단된 평형(단속평형; punctuated equilibrium) 가설이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단 여기까지.

처음부터 진화를 '유전자 집합의 변화'라고 규정하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훨씬 쉬워졌다. '집합'이라는 개념 덕택이다. 그렇지만 자연선택을 동어반복이 아닌 형태로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선택'이 효과일 뿐이라고 주장해도 그 선택이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가를 동어반복을 이용하지 않고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소용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난 차라리 유전자 표류가 받아들이기 쉽다. 물론 자연현상에 완벽한 무작위성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유전자 표류도 어느 정도 수정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