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네픈 진화모형(Bak-Sneppen evolution model; BS model)은 자기조직화임계성(self-organized criticality; SOC)을 보이는 모형 중 하나로 제시되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N개의 종(species)이 원탁 주위에 같은 간격으로 둘러 앉아있다고 하자. 물론 가상의 공간이다. 각 종에는 0과 1 사이의 랜덤한 수가 주어지는데 그게 그 종의 적합도(fitness)이다.

적합도가 가장 낮은 종은 멸종시키고 그 자리에 새로운 종을 추가하되 새로운 종의 적합도는 역시 0과 1 사이의 랜덤한 수로 주어진다. 그런데 멸종한 종은 혼자 멸종되지 않고 물귀신 작전을 써서 자기 양옆의 종들도 같이 멸종시킨다. 물론 그 자리에도 새로운 종들이 0과 1 사이의 랜덤한 적합도를 지닌채 들어온다.

이렇게 적합도가 가장 낮은 종과 그 양옆의 종들, 즉 3개의 종들이 멸종되고 새로운 종으로 교체되는 일이 되풀이되는데 이게 BS 모형의 모든 것이다. 종의 '멸종과 교체'라고 봐도 되고 종의 돌연변이로 봐도 되는데 원래 갖고 있던 적합도와 완전히 무관한 적합도가 새로 주어진다는 면에서 멸종과 교체로 보는 관점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 모형의 몇 가지 중요한 결과를 소개하겠다. 적합도가 낮은 종들이 계속 사라지면서 거의 대부분의 종들의 적합도가 어떤 특정한 값보다 높은 상태가 유지된다. 이러한 문턱값은 외부에서 주어졌거나 고정시킨 게 아니라 그냥 모형으로부터 나타난다.

일단 이러한 '대부분의 종의 적합도가 어떤 문턱값보다 큰 상태'에 도달하면 이제 모래쌓기 모형에서처럼 '사태(avalanche)'를 정의할 수 있다. 모든 종의 적합도가 그 문턱값보다 높다고 하자. 하지만 그중에서도 적합도가 최소인 종은 적어도 1개 이상 존재한다. 그러면 그 종과 양옆의 종들의 적합도를 0과 1 사이의 랜덤한 값으로 변화시킨다. 셋 중 하나라도 문턱값보다 낮은 적합도가 주어지면 사태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리고 문턱값보다 낮은 적합도를 갖게 된 종은 다음 순서에서도 선택이 되고 그 종의 양옆의 종들에게 역시 랜덤한 적합도가 주어질 것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모든 종의 적합도가 다시 문턱값보다 높은 상태가 되면 그때 사태가 끝난다. 그리고 사태가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멸종된 종(즉 새로운 적합도를 부여받은 종)의 개수가 사태의 크기로 정의된다.

그리고 이 사태의 크기는 거듭제곱 꼴을 따르므로 임계현상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고 앞서 말했듯이 어떤 특정한 조절변수도 조절되지 않았으므로 지가 알아서 임계상태로 갔다고 하여 자기조직화임계성(SOC)이라 이름붙일 수 있다.

모래쌓기 모형도 SOC라고 했지만 모래쌓기 모형에는 모형의 규칙에 이미 시간규모의 분리라는 '조절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자기조직화'라고 부르기 힘들다. '누군가'가 시간규모를 분리시켰기 때문에 임계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BS 모형은 어떤가? 얼핏 보기에 아무런 조절 메커니즘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어떤 순간에 적합도가 가장 낮은 종을 골라서 멸종시켜야 하는데 적합도가 가장 낮은 종을 '누군가'가 판단해야만 한다. 모래쌓기 모형에서처럼 여기서도 그 '누군가'는 시스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하고 그 누군가가 개입된 이상 시스템이 '자기조직화'했다고 말하기 힘들어진다.

단지 시스템이 열린계냐 닫힌계냐의 문제가 아니고 외부와의 상호작용 여부만의 문제도 아니다. 시스템에 관한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존재 없이도 임계상태가 될 수 있다면 자기조직화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자기조직화라는 말을 붙이기 힘들어진다. 또 한꺼풀이 벗겨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