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컵라면에 미지근한 물을 부어서 덜 익은 라면을 씹는 느낌이다. 고율님의 글 중 일부를 옮긴다.

'뭐든 간에 자연에서 비약이 일어난다면 그 근원은 확률이 아닐까'

사실 '비약'이 뭐냐는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불연속이냐? 뭐 그렇게도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이곳에서 저곳으로 중간을 거치지 않고 움직인다는 말인데 '비국소성(nonlocality)'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한다. 물체의 위치뿐만 아니라 속도나 각속도나 가속도 같은 것들이 그러한 불연속성을 나타낼 수도 있다.

멈춰 있던 당구공이 굴러온 당구공에 맞아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할 때에도 자세히 보면 운동량을 가진 굴러온 당구공의 앞면이 멈춰 있던 당구공에 부딪히면서 힘을 주기 시작하고 그 순간 미세하게나마 멈춰 있던 당구공의 부딪힌 면 부근이 눌리면서 멈춰 있던 당구공과 바닥 사이의 마찰력을 야기하고 이러한 복합적인 과정을 거쳐 결국 움직이기 시작한다. 거시적으로는 순간적인, 즉 불연속적이고 비약적인 변화인 것 같지만 미시적으로는 연속적인 일련의 과정들이 개입되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간에 그게 물리학이 밑바탕에 깔고 있는 기본적인 가정이자 철학이다. 물론 양자역학이라는 '상식에 저항'을 일으키는 이론이 나온 이후로 세계에 대한 그림이 많이 바뀌었고, 또한 비국소성에 대한 논란도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 같지 않다.

뭐 그렇게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의 인식 능력의 한계라는 걸 도입하면 현상적으로는 비약이라는 말을 쓸 수 있다. "너무 빨라서 지나가는 걸 못봤다"는 사람에게는 '순간이동'이 현실이 된다. 내가 숨쉬는 이 공기를 이루는 입자들 각각의 운동을 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므로 그 안에서 공기 분자의 충돌에 의한 효과 역시 알 수 없다. "기체 분자가 너무 작고, 그것들 사이의 충돌이 너무 빨라서 못봤다." 그러니까 통계역학이 필요했던 거겠지.

이런 관점에서 보면, 비약의 근원이 확률이라기보다는 비약하는 것으로 보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확률/통계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물론 확률이라는 게 좀더 근본적인 원인이어서 그로 인해 비약이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고전)물리학의 기본적인 철학인 국소성과는 배치되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