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번에 '끄적'이라는 글에서 정리되지 않은 질문이 있다고 한 적이 있는데 간단히 정리하려고 한다. 우선 그때 들은 권용경 교수님의 세미나 발표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바름수소(ortho-hydrogen; 물리용어조정안에 따름)의 상전이 임계온도를 고전적인 몬테카를로 방법으로 계산하면 14.9K인데 실험 결과는 2.8K이다. 이 차이는 아마도 양자역학적 효과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이를 고려한 몬테카를로 방법을 이용하면 실험 결과와 잘 맞지는 않지만 적어도 오차를 많이 줄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참고로 바름수소란 수소분자를 이루는 수소 2개의 양성자의 자기모멘트의 방향이 같은 방향인 수소를 가리키며, 두 양성자의 자기모멘트 방향이 다르면 버금수소(para-hydrogen)라고 한다.라고 위키피디아에 나와있다.

그래서 해밀토니안(H)은 각 수소들의 각운동량에 의한 에너지와 운동에너지의 합(T)과 수소들 사이의 포텐셜 에너지(V)의 합으로 씌어지고 이 해밀토니안을 이용하여 경로적분을 한다. 그런데 여기서 T와 V는 맞바꿀 수 없으므로(non-commutative) 정확히 풀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원시 어림(primitive approximation)을 하는데 exp(-β(T+V)) = exp(-βT) exp(-βV)로 가정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T와 V가 맞바꿔지지 않으므로 위 식의 오른쪽에는 무수히 많은 항들이 달라붙어야 하는데 그걸 다 무시하겠다는 말이다.

그리고나서 β=τL 로 놓고 푼다. 임계온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β는 큰 값을 갖는데 이걸 L개로 쪼개어 각 구간을 τ에 대해 적분하겠다는 거다. β는 큰 값인데 τ=β/L은 작은 값이 되었으니 온도로 치면 높은 온도가 된 셈이다. 즉 낮은 온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높은 온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의 합으로 변환하는 방법이다. 하여간 경로적분에서 β는 '허수 시간'에 대응한다는 식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해석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위 그림을 L 축으로 보면 상호작용하는 중합체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길이가 L인 중합체가 여러 개 있고 각 중합체를 이루는 L개의 분자들이 '같은 시간 평면' 위에서 상호작용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몬테카를로 시늉내기를 하면 고전적인 결과보다 훨씬 실험 결과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차이는 양자역학적 효과를 고려하는 것이다.

어쨌든 내 질문은 뭐였냐면, 원시 어림을 한다는 말은 T와 V 사이의 맞바꿀 수 없는 성질을 무시하겠다는 건데 여기서 이미 '양자역학적 효과'가 사라지는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양자효과는 불확정성 원리로 표현되고 불확정성 원리는 맞바꿀 수 없는 성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간과한 것은 '경로적분'을 이용하는 과정에서 이미 양자효과가 포함되어 있고 T와 V 사이의 맞바꿀 수 없는 성질을 고려하든 안하든 양자효과는 작용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게 있다. 우리가 결정론적인 시스템을 다루고 있다면 그 시스템은 단 한 개의 경로만 따라 움직이므로, 경로적분, 즉 가능한 모든 경로에 대한 합을 구하는 순간 양자효과가 포함되므로 위 말이 맞지만, 확률론적인 시스템을 다루고 있다면 그 시스템에 대한 기술은 앙상블 평균을 통해 얻어질 수밖에 없고, 그 앙상블 평균은 결국 가능한 모든 상태에 대한 합이므로 가능한 모든 경로에 대한 합인 경로적분을 한다고 해서 양자효과로 볼 수 없지 않을까였다.

물론 여기서도 내가 간과한 것은 앙상블 평균이 언제나 경로적분과 같은 결과를 주느냐다. 그리고 이건 곧바로 에르고드 가설이 맞는지 여부와 연결되는 것 같다. 하지만 위에서 다루는 시스템이 에르고딕하다고 가정할 이유는 없으므로 앙상블 평균이 경로적분과 같을 이유도 없고 그러므로 경로적분을 하는 순간 이미 양자효과는 고려된 것이고 원시 어림을 하더라도 이는 여전히 유효하므로 고전적인 몬테카를로 방법보다 실험 결과를 더 잘 설명하게 된 그러한 차이는 '양자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라는 게 지금 결론이다.

괜히 복잡해진 것 같은데 잘 몰라서 그렇다. 그런데도 참 용감하게 질문을 했더랬다.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