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올린 내용들은 준비단계에 불과했고요,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질서한 접촉 과정(disordered contact process; DCP)의 임계현상은 무질서가 없는 접촉 과정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 본격적으로 나온다는 거죠. 아직 공부가 부족하여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려면 멀었고요, 오늘 저녁에 본 논문들을 중심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앞의 '해리스 기준 적용하기'라는 글에서 보았듯이 접촉 과정 또는 DP 보편성 분류에 포함되는 모형들은 무질서가 조금이라도 개입되면 임계지수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연구가 지난 달에 PRE에 나오기도 했지만요.) 달라지기는 달라지는데 어떻게 달라질거냐?라는 문제가 있구요, 이에 대한 시나리오가 2003년 Hooyberghs(발음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없어서 그냥 씁니다. 소속은 벨기에인데 그쪽 사람인 듯 해요.) 등이 쓴 PRL 논문에 의해 처음(?) 제시됩니다.

결과만 쓰면, 무질서가 약하면 무질서의 정도에 따라 임계지수가 연속적으로 변하다가, 무질서가 어떤 문턱값보다 커지면 그 이후에는 강한 무질서 고정점(strong disorder fixed point)이 임계행동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약한 무질서는 기존의 눈금잡기 방법이 잘 맞되 그 지수만 변화시키며, 강한 무질서는 새로운 눈금잡기 방법으로만 설명된다는 것도 덧붙여야 겠습니다. (또한 여기서 '고정점'이라는 건 되틀맞춤무리(RG) 변환에 대해 불변이라는 말인데, 이건 RG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므로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때로 미루겠습니다.)

강한 무질서 고정점은 이후에 무한 무질서 고정점(infinite randomness fixed point; IRFP)으로도 불립니다. 하여간 IRFP에서의 임계지수를 '해밀토니안 형식'을 도입해서 정확한 값을 구했는데요, 원래 해밀토니안은 평형모형에서만 정의되고 비평형모형에서는 정의되지 않지만 그래도 적용해서;;; 풀었다는 겁니다. 질서변수에 관한 지수는 (3 - sqrt(5)) / 2 라고 하는데 이렇게 무리수가 나오니 뭔가 신기한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예측(IRFP의 존재 및 약한 무질서의 경우 연속적으로 변하는 임계지수)을 컴퓨터 시늉내기를 통해서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에 보이타(T. Vojta)와 딕키슨(Dickison)이 PRE에 낸 논문에서 저자들은 기존의 시늉내기보다 훨씬 오랫동안 시늉내기한 결과를 바탕으로 무질서의 크기와 상관없이 모두 똑같은 임계지수(위의 Hooyberghs가 계산해낸 그 값)를 보여준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들의 시늉내기 결과를 믿는다면 기존의 시나리오는 수정되어야 하고 기존의 시늉내기 결과들은 시늉내기를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믿을 수 없는 결과다.라고 말해야겠죠.

보이타도 자신들의 결과가 '모두 똑같은 값'이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쓰기는 했습니다. 어쨌거나 왜 이렇게 단순한 모형이 복잡한 논의를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지난 번에 소개한 '활성화된 눈금잡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초기조건에서 시작한 시스템이 정상상태에 빨리 도달한다면 시늉내기를 많이 하지 않아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이론을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DCP에서는 시스템이 정상상태에 도달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엄청나게 길다는 문제가 생깁니다. 정상상태로 수렴하는 모양이 시간에 따라 지수함수적으로 감소(~ exp(-t))하면 빠른 거고요, 임계점에서는 보통 거듭제곱 꼴(~ t^(-a))로 감소하는데 이러면 벌써 매우 느려집니다. 이걸 임계 느려짐(critical slowing down)이라고도 하죠. 그런데 저 '활성화된 눈금잡기'가 말하는 건 시간의 로그를 한 번 씌운다음에 거듭제곱 꼴로 느려진다는 겁니다. 즉 ~ [log t]^(-a) 이런 식이죠. a=1이라고 가정하면, t가 10^100 (엄청 길죠) 정도 돌린다고 해도 그 결과는 겨우 0.01(=1/100) 줄어드는 걸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지난 9월 2일에 아카이브(http://arxiv.org)에 올라온 팔러트(Fallert)와 타라스킨(Taraskin)의 논문은 이런 어려움과 기존의 여러 시나리오를 간단히 소개한 후 자신들의 시늉내기 결과를 제시합니다. 논문 제목은 'DCP의 눈금잡기 행동'인데요, 그러고보니 관련 논문들의 제목이 대개 다 비슷비슷합니다. 제목만 보면 그놈이 그놈인 것 같아요. 무질서를 연구하는 논문들 치고는 뭔가 균질한 제목들입니다;;;

하여간 문제가 되었던 건, 약한 무질서에서 나타나는 임계지수가 연속적으로 변하냐(즉 보편적이지 않으냐), 아니면 무질서의 정도와 상관없이 일정한 값이냐(즉 보편적이냐)입니다. 여러 다양한 물리량을 측정해봄으로써 이런 논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데요, 이들은 준정상상태의 지속시간 분포를 측정했습니다.

역시 주요한 결과만 간단히 소개하면요, 무질서가 강할 때에는 활성화된 눈금잡기가 잘 맞는데, 약한 무질서에서는 좀 아리까리하다;;;입니다. 필요한 일을 한 건 맞지만 그 결과가 그리 중요한 도움이 되지는 않은 것 같은 논문입니다. 그래도 '연속적으로 변하는 임계지수'에 손을 들어준 것 같고요, 다만 무질서의 정도가 커져도 그게 Hooyberghs 등이 제시한 값으로 수렴하는 건 잘 될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 글은 이 정도로 하고요. 사실 무질서에 의한 임계상태의 변화를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그리피스 특이성 또는 그리피스 상태(Griffiths singularity/phase)에 대한 내용이 순서상으로 먼저였는데 아직 못썼네요. 그리피스가 그리피스 상태의 존재를 증명한 논문은 1969년에 PRL에 출판되었습니다. 글자만 읽어보기는 했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물리적으로 어떤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으므로 다른 글에서 정리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