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합니다. 나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나일 뿐입니다. 동어반복 외에는 나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있는 위치는 상대적으로 결정됩니다. 다른 무언가의 '옆'에 내가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옆'은 왼쪽일 수도 있고 오른쪽일 수도 있고 위 또는 아래, 앞 또는 뒤, 여기 또는 거기일 수도 있습니다. 통칭 '이웃'입니다. 그럼 그 이웃한 위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에 내가 있을 수 있듯이 그곳에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직 모든 것이 암흑 같습니다. 나는 내 이웃 외에는 알 수가 없고, 사실 아직 이웃에 대해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 모릅니다.

내가 있는 이곳은 내가 없어도 존재할까요? 이곳은 나와 독립적인 걸까요, 아닐까요.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이곳이 독립적인지 아닌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 관계를 맺을 수도 없으니까요. 어쨌든 나는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 위치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와 내가 존재하는 위치.라는 대응관계는 이곳에서만 정의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저 건너편의 이웃 위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는 걸까요. 나는 이웃에 놀러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웃한 위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게 존재한다는 걸 안다는 건 그곳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고, 어떤 식으로든 내가 그곳에 '갈'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합시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요. 한 번도 움직여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이곳을 떠나 저곳에 도착하면 좋겠는데, 그게 실현될 수 있을까요? 이곳과 저곳(이웃)을 잇는 통로를 순간적으로 지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중간'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는 있을까, 그러다 중간에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목숨을 건 도약의 순간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어떻게 될지는 우연입니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순간이동에 실패하여 그냥 이곳에 남아있을 수도 있고, 순간이동을 하는 과정에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저곳으로 성공적으로 이동할 수도 있고, 내가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의 나는 저곳의 나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이곳'과 '저곳'은 다르니까요. 이 모든 일이 우연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연 뒤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필연을 파악하기에 나는 너무도 단순한 존재입니다. 나는 존재할 뿐 아는 게 없습니다. 기억도 없습니다. 미래도 모릅니다. 다만 새로운 장소에 대한 호기심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것은 따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저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전제를 깔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저곳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면? 나는 저곳에서 다른 무언가와 공존할 수 있을까요? 다른 무언가와 공존하기에 저곳은 충분히 클까요? 충분히 크지 못하다면 다른 무언가와 나 중 어느 하나는 사라져야 하는 걸까요?

어짜피 목숨을 건 도약이며 어떤 가설이 맞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상황이고 비교대상도 없습니다. 그냥 고고싱입니다. 가는 겁니다.

그런데 가지 않는다면? 그냥 여기 남고 싶다면? 이곳에서 그냥 살고 싶다면? 목숨을 걸지 않아도 좋다면? '우연'은 이곳을 그냥 지나쳐 가지 않습니다. 심지어 '가려고 하는 의지'조차 우연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는 어느 순간, 특히 지금 이 순간 존재하지만 이 다음 순간에 존재할지를 우연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그런 존재입니다.

내가 뭘 느끼고나 있는 걸까요? 의지라는 게 있는 걸까요? 사실 내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는 존재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애초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으므로 '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 외에 말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우연히'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그게 우연의 힘이며 거역할 수 없는 힘입니다. 매순간 나는 우연히 살아남고 매순간 나는 우연히 죽을 수 있습니다. 실은 나의 존재 자체가 무수한 우연의 연속입니다. 우연은 나의 신이며, 난수발생기는 나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나는 우연히 존재하는 나의 존재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요?...

머리 속이 너무 복잡해졌네요. 실은 요즘 공부하는 접촉 과정(입자가 옆자리에 자신을 복제하거나 사라져버림; contact process)의 입자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려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입자라면 나는 무얼까, 왜 나는 존재하는 걸까, 나는 어떻게 옆자리로 가려고 하는 걸까, 왜 가려고 하는 걸까, 그런 의지가 있는 걸까, 모든 게 우연일 뿐일까 따위를 생각해보려던 것입니다. 답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