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02/26

엔트로피 증가법칙/경향에 관한 스탠포드 철학 백과사전의 글 "Thermodynamic Asymmetry in Time"을 읽었다. 글쓴이는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 철학과의 캘린더 교수다(발음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 글을 읽으면서 물리학의 다른 분과에서 제기된 시간 비대칭성에 대해 새로 알게 되었고 그외에 철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도 냄새만 조금 맡아볼 수 있었다. 이 글이 다루는 두 가지 문제는 다음과 같다. (1) 열역학적 시간 비대칭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2) 열역학적 시간 비대칭성은 다른 시간 비대칭성을 설명하는가? 두번째는 일단 나의 관심사가 아니므로 제끼고 첫번째만 보겠다.

우선 열역학적 엔트로피로 환원할 수 있는 통계역학적 엔트로피로 무엇이 가장 적합한가에 대한 합의가 아직까지는 없다는 것이 눈에 띈다. (참고로 이 글은 2006년 8월에 업데이트되었다.) 볼츠만의 엔트로피부터 보자. 어떠한 거시상태 M에 해당하는 미시상태 X들을 생각할 수 있다. 위상공간에서 이 미시상태들의 집합을 Γ(M)이라고 하고 그 크기를 |Γ(M)|이라고 하자. 볼츠만 엔트로피는 특정한 거시상태 M에 대해 S(M(X)) = k log |Γ(M)| 로 정의된다. 여기서 k는 볼츠만 상수다. 조합적인 이유(combinatorial reasons)로 Γ의 대부분은 열적 평형 상태에 해당한다고 한다. 즉 열적 평형 상태의 수가 비평형 상태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다. 시스템에 가해졌던 제한을 완화하면 미시상태들은 더 넓은 영역으로 퍼져나갈 것이고 |Γ(M)| 역시 커질 것이다. 이것이 엔트로피 증가법칙을 설명하는 틀이다.

하지만 로슈미트가 제기한 시간 가역성 패러독스는, 원자들이 가역적이라면 원자들의 집합도 가역적이어야 하므로 볼츠만의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어떤 증명과 해석을 들이댄다고 하더라도 로슈미트의 문제제기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보인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하나는 특정한 경계조건을 이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인 자연법칙을 도입하는 것이다. 특정한 경계조건이 의미하는 것은 시스템의 초기조건은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여야 한다는 말인데, 엔트로피가 매우 낮으므로 증가할 수밖에 없고, 그것이 우리가 관찰하는 세계라는 주장이다. 이를 '과거가설(past hypothesis)'이라고 한다.

오케이. 일단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과거가설이 엔트로피 증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쳐도, 그것이 엔트로피가 줄어들 가능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이용될 수 없다. 그래서 이후에 나오는 과거가설에 관한 얘기들 역시 내 관심사로부터 벗어난다. 하지만 우주의 빅뱅이라든지 인플레이션 이론이라든지 하는 것들과 관련하여 엔트로피를 논의하고자 하는 경우라면 다시 읽어볼 필요는 있겠다.

2.5의 Time Itself라는 절의 내용은 흥미로웠다. Weingard라는 사람이 1977년에 주장한 것이라는데, 시간 비가역성은 시간 포텐셜이 작용하기 때문이란다. 지표면에서 위-아래 방향의 비대칭성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지구의 중력 포텐셜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과거-미래의 비대칭성은 시간 포텐셜에 의한 효과라는 것이다. 중력 포텐셜이 공간의 비대칭성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위-아래 비대칭성을 설명하듯이, 시간의 비대칭성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과거-미래 비대칭성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 대칭성이 깨지는 것이라면, 뉴턴 역학을 따르는 입자들은 왜 가역적이라고 가정되는가. 또는 시간 대칭적인 양자역학은 왜 여전히 성립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시간 포텐셜'은 너무 일반적이어서 열역학적 시간 비대칭성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무딘 개념인 듯 하다. 흥미롭지만 패스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으로 '개입주의(interventionism)'라는 얘기가 나온다. 우선 위상공간에는 평형상태로 가는 점들의 부피와 평형상태로부터 멀어지는 점들의 부피 사이에 심각한 비대칭성이 있다는 전제를 깔고, 어떤 시스템이 외부의 랜덤한 요동에 의해 평형상태로 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논의를 펼치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로는, 외부의 랜덤한 요동 역시 시간 대칭적인 시스템의 일부이므로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시스템에서 시간 비대칭성이 나타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이 주장 역시 논란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는 양자역학에서의 시간 비대칭성이다. 양자역학 자체는 시간 가역적인 방정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 하지만 측정(measurement)에 의해 양자상태가 붕괴되는데 이를 고려하는 경우 측정이 시간 비대칭성을 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그 중 한가지 이론이 GRW(Ghirardi, Rimini, Weber라는 사람들의 이니셜을 땄다)인데 이 글에 나온 설명만으로는 측정에 의한 양자상태의 붕괴와 이들의 주장 사이의 연관성을 알기 힘들다. 이들의 주장은 엔트로피가 증가할 가능성은 압도적으로 높고, 줄어들 가능성은 그 반대라는 것인데, 맨 앞에 소개한 볼츠만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구조인 듯 하다.

시간에 대해 비대칭적인 자연법칙을 도입하는 것은 앞에서도 이러저러한 방법들로 시도되었지만 실제로 그러한 법칙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해버리면 너무 재미없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제기된 여러 아이디어들 중에 역시나 볼츠만의 엔트로피가 제일 나은 것 같다. 미시적인 시간 대칭성에 의해 거시적으로도 비대칭성은 나타날 수 없다. 다만 앞에서 말한 '조합적인 이유', 즉 평형상태의 수가 비평형상태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에 의해서 거시적으로는 비대칭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평형상태에서 비평형상태로 변할 가능성도 존재하며 시스템 크기가 커지면서 이 확률은 급속히 0으로 줄어든다는 것을 덧붙여야 한다. 최근 D. Evans 교수팀의 실험연구를 제외하고 우리가 일상에서 관찰해온 엔트로피 증가법칙이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거시적인 시간 비대칭성의 근원은 시스템 크기가 커짐에 따른 조합적인 이유에 근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