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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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처>, <사이언스> 등의 편집자로 일했던 데이비드 린들리가 2001년에 썼고 서강대 화학과 이덕환 교수가 2003년에 번역한 <볼츠만의 원자>를 읽었다. (이덕환 교수 홈페이지를 보니 로버트 러플린의 <새로운 우주>를 번역하신 분이네요.) 이 책은 19세기 후반에 고전물리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원자가설에 기반하여 통계물리학을 정립한 볼츠만과 그의 생애, 그리고 원자가설에 반대하는 학자들과의 철학적인 논쟁 등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원자가설은 고대의 루크레티우스, 데모크리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원자들의 '자연스러운' 운동으로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던 시도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어서 한동안 잊혀져 있었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고 자연현상에 대한 정교한 이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원자가설은 다시 논쟁거리가 되었다. 산업혁명기의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열역학과 전기현상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열역학 제1법칙)이 정립되었으며 클라우지우스 등에 의해 엔트로피 증가법칙(열역학 제2법칙)이 태동하게 된다. 맥스웰과 볼츠만은 수많은 원자(또는 분자, 또는 물질의 기본단위)로 이루어진 시스템을 다루기 위해 통계적인 방법을 도입한다. 그전까지 물리학은 결정론적이며 확실해야만 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물리 시스템에 불확실성(통계, 확률)을 도입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느냐에 관해 논란이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을 도입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인가. 이미 기존의 열역학 법칙들과 PV=nRT와 같은 측정가능한 물리량들의 관계가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데 굳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증명하기도 힘든 '원자의 존재'를 도입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철학적으로는 에른스트 마흐의 논리실증주의가 볼츠만의 원자가설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물리학은 측정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이용해야 하며 불필요한 개념을 도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논리실증주의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볼츠만과 볼츠만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도입할 수 있으며 그것이 세계를 더 잘 설명해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론이 갖고 있는 힘이었다.

이외에도 볼츠만이 처음 열역학 제2법칙을 원자가설을 이용해 설명하려고 했을 때부터 여러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선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법칙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볼츠만은 뉴턴 역학을 따르는 원자들의 상호작용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 시간에 대해 가역적인 원자들로부터 시간에 대해 비가역적인 엔트로피 증가법칙이 나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엔트로피 증가법칙을 의심하는대신 볼츠만의 원자가설을 의심한 것이다. 로슈미트가 시간에 대한 가역성 문제를 제기했다면 푸앙카레는 닫힌 시스템은 시간이 흐르면 다시 초기 상태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역시 엔트로피 증가라는 비가역적 성질에 의문을 제기했다.

볼츠만은 이런 문제제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엔트로피 증가는 '법칙'이 아니라 '경향'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원자가설은 더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다. 열은 대부분의 경우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0에 가까운 확률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확률은 매우 낮으므로 우리가 실험을 통해 확인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결론은 원자가설을 배제하고 '눈에 보이는 물리량의 측정'만을 이용하여 얻을 수는 없는 결론이다. 이러한 해석은 로슈미트와 푸앙카레의 문제제기를 수용하면서도 엔트로피 증가 '경향'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볼츠만은 맥스웰이 통계적인 방법을 도입했던 것을 새로운 방법으로 정당화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엔트로피 증가 '경향'도 설명할 수 있었다. 기존의 물리학적 대상들은 '연속적인' 위치, 운동량, 에너지를 갖는다. 그리고 볼츠만과 맥스웰도 당연히 그러한 '연속성'에 기반한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엔트로피 증가 '경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볼츠만은 '이산적인(discrete; 띄엄띄엄한)' 가정을 도입한다. 즉 n개의 원자가 m개의 에너지 상태에 놓여있을 확률을 계산함으로써 엔트로피 증가 '경향'을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m을 무한대로 보내는 근사를 통해 원래의 연속적인 에너지로 이해할 수 있다. 볼츠만이 도입한 '이산적인 에너지'는 그저 하나의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흑체복사를 연구하던 플랑크는 볼츠만의 방법을 이용하여 '이산적인 에너지'를 도입함으로써 흑체복사를 이론적으로 설명해낼 수 있었다. 플랑크의 이 가정은 하나의 방법에 그친 것이 아니라 물질의 속성에 관한 무언가 더 중요한, 그리고 실제로 획기적인 측면을 발견해낸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볼츠만이 철학적인 논쟁에 휘말려 기력을 잃어가고 있을 즈음 원자가설을 증명해주는 실험적 발견, 이론적 성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플랑크의 논문이 1900년에 나왔고 1905년에는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을 원자가설을 이용해 설명해내고 또한 광전효과에 대한 설명을 통해 원자가설을 다시 한번 확고하게 한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이 볼츠만으로부터 받았던 영향을 생각하면 볼츠만을 양자역학의 할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기력이 쇠한 볼츠만은 새로운 물리학의 흐름을 쫓아가지 못하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유행이었던 자살을 하여 삶을 마감한다.

원자가설은 이제 더이상 가설이 아니다. 20세기에는 원자에 대한 이해가 더욱 높아졌다. 원자를 이루는 양성자, 중성자, 전자가 발견되었고 각 입자들은 더 작은 입자들(쿼크, 렙톤 등)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졌으며 이제 더 근본적인 구성요소로서 끈이론이 나왔다. 이는 결국 거시적 현상의 미시적 기초를 찾으려는 노력의 산물이며 기본입자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이러한 입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거시적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도 많이 연구되고 있으며 이러한 방법론은 물리학적 대상을 넘어서서 전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다음부터는 늘 하는 얘기이므로 이쯤에서 그만두겠다.

흥미진진한 책을 번역하느라 애쓰신 옮긴이의 노력은 박수를 받아야 하지만, 군데군데 비문이 섞여 있고 오타가 발견된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비문과 오타는 샤프로 일일이 체크하는 편인데 이번에는 게을리 해서 말할 처지가 못된다.

어쨌든 관심사나 전공분야에 무관하게 물리학의 발전과 과학이론의 정립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 강추.

* 덧붙여 참고할 내용: 착한왕 싸이트 관련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