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것은 성장소설입니다. 한 인간의 성장일 뿐 아니라 하나의 사회, 하나의 세계의 성장이기도 합니다.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변하지 않는/않을 진리를 추구하고 이를 유희로 승화시키는 학자와 유희자의 공동체는 "인위적으로 영원히 유년 상태에 멈추어 있는 사람들"(232쪽)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공동체 역시 유년 상태에 멈추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유년입니다. 그 스스로 완전할 수도 없고 스스로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거기에 안주하고 자신을 지탱해주는 외부에 무관심하며 심지어 미숙하며 속된 것이라고 깔보고 경멸합니다. "우리의 가장 신성한 임무는 나라와 세계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해 주는 일"(266쪽)이라 스스로를 규정하는 이 공동체의 정신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외부 세계에 대한 무관심과 경멸로 이어져야 할 필요는 없는 거겠죠.

크네히트는 외부 세계의 대변인을 자처했던 플리니오의 비판으로부터 카스탈리엔을 옹호했고, 종교 종단인 베네딕트회의 역사연구가 야코부스 신부로부터 역사와 현실에 대해 배웠으며, 같은 유희자 동료이지만 카스탈리엔과는 이질적인 구석이 있는 테굴라리우스와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이 믿고 옹호해온 카스탈리엔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아 갑니다.

쓰다보니 다 나왔지만, 외부 세계라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의 '역사'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는 말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 자신의 물적 기반이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에 대한 고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역시 이미 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공동체의 사명인 '세계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외부의 현실과 자신의 역사를 배제하고 만들어진 정신적 토대란 과연 얼마나 견고하며 또한 중요하게 여겨질 수 있는 걸까요.

결국 크네히트는 자신이 그 정점에 있었던 유희를 포기하고 외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따르는 길을 선택하고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사실 줄거리만 들었다면 그래서 뭐?라고 물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 평생을 카스탈리엔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해왔으나 또 언제나 공허함을 느끼고 회의해왔던 한 인물이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낯선 세계로 향하는 모습은... 비록 그것이 실제로 있을 법하지 않다고 비판할지라도 어떤 전율을 느끼게 하는 것만큼은 틀림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유년 상태'란 실제로 있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지만, 또한 그 유년기로부터 얻은 교훈을 간직한 채 그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하나의 발걸음입니다. 문득 닐 암스트롱이 했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한 개인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커다란 도약이다." 크네히트의 개인적인 행동은 카스탈리엔에게 커다란 도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쓰다보니 크네히트빠가 된 기분입니다. 제가 이처럼 몰입한 이유는 저 역시 '영원한 유년 상태'에 머무르고자 하는 욕망과 실제로 그런 건 있을 수 없다는 현실 인식 사이에서 갈등하기 때문입니다. 네, 아직 철이 덜 들었습니다;;; 이전 글에서도 카스탈리엔의 일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감상을 적었는데, 유년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일 뿐입니다. 이곳은 전쟁터이며, 잠깐의 평화조차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