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면 뭔 소리인가 싶겠네요. 모래더미 모형은 원래 열린계(모래알이 드나듬)로 정의되었는데요, 이 모형을 비평형 상전이의 틀로 보려는 시도 중에 닫힌계(모래알 개수가 보존)로 정의한 고정에너지 모래더미(fixed enegy sandpile; FES)가 있습니다. 비평형 상전이의 틀에 관해서는 2년 전에 "자기조직하지 않는 모래쌓기"라는 글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sandpile을 '모래쌓기'로 옮겼다가 언제부턴가 '모래더미'로 부르고 있습니다.) 열린계로 정의된 모래더미 모형을 "몰리고 흩어지는 모래더미(driven dissipative sandpile)"로 부릅니다. 이걸 제맘대로 약자로 DS로 쓰겠습니다.

DS에서 정상상태일 때의 모래알의 밀도(= 총 모래알 개수 / 시스템 크기)와 FES에서 상전이가 일어날 때의 모래알의 밀도가 같다는 주장이 "밀도 추측(The Density Conjecture)"입니다. FES를 제시하고 연구했던 사람들이 컴퓨터 시늉내기 결과에 근거해서 이 추측을 믿어왔는데요, 추측이 틀렸다는 걸 정확한 계산을 통해 보여주는 논문이 최근에 나왔습니다:

A. Fey, L. Levine, and D.B. Wilson, Driving Sandpiles to Criticality and Beyond, arXiv:0912.3206v3

1저자 소속은 델프트응용수학연구소, 2저자는 MIT 수학과, 3저자는 마이크로소프트 연구소(?)네요. 수학쪽에서도 모래더미 모형을 연구한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이제야 논문을 볼 기회가 생겼네요. 이 논문은 <피지컬 리뷰 레터스(PRL)>에 실릴 예정입니다.

2차원 사각격자 위에서 정상밀도(stationary density)는 17/8(=2.125)로 알려져 있습니다. FES를 제시한 사람들(VDMZ; Vespignani, Dickman, Munoz, Zapperi)이 FES를 시늉내기 한 결과 얻은 문턱밀도(threshold density)는 2.1250(5)입니다. 이에 반해 위 논문에서 얻은 시늉내기 결과는 문턱밀도가 2.1252881(3)입니다. (참고로, 예를 들어 3.14(1)은 3.14 ± 0.01을 뜻합니다.) 이처럼 차이가 너무 작아서 적당히 시늉내서는 그 차이를 보기 힘이 듭니다.

시늉내기 결과는 아무리 정확하다고 주장해도 완전히 믿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위 논문에서는 정상밀도와 문턱밀도를 모두 정확히 구해서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팔찌 격자(bracelet lattice) 위의 모래더미 모형이 그 예입니다. 팔찌는 양끝이 이어진 1차원 격자인데, 이웃한 두 노드 사이에 2개의 링크가 있어서 각 노드의 이웃수는 4인 격자입니다. 그중 노드 하나를 골라 수채자리(sink site)로 만드는데, 수채자리는 모래알을 무한정 받을 수 있습니다. 팔찌 위의 모래더미 모형에서 정상밀도는 5/2라고 합니다. 문턱밀도 ζc는 다음 식의 근이라네요.

$$\zeta=\frac{5}{2}-\frac{1}{2}e^{-2\zeta}$$

그 값은 약 2.496608입니다. 다음으로 초기밀도 λ의 함수로 최종밀도 ρ를 구합니다:

$$\rho(\lambda)=\left\{\begin{array}{ll} \lambda, & \lambda\leq \zeta_c \\ \frac{5-\exp[-2\lambda]}{2}, & \lambda>\zeta_c\end{array}\right.$$

여기서 잠시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DS이고 에르고딕하다면 초기밀도와 상관 없이 최종밀도는 정상밀도와 같은 값이 될 겁니다. FES라면 모래알 개수가 보존되므로 초기밀도와 최종밀도는 언제나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원래 DS라면 수채자리가 시스템의 외부, 즉 환경으로 여겨지며, FES에서는 수채자리가 아예 없습니다. 어느 쪽(DS vs. FES)을 생각하더라도 최종밀도에 관한 위 결과는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더 자세하게 풀어놓은 논문을 보면 의문이 해결됩니다. 일단 수채자리를 하나 정해주고, 수채자리를 포함하여 모래알 개수는 보존되며, 최종밀도는 수채자리를 제외한 나머지 노드에 대해서만 계산됩니다. ρ를 질서변수라고 하면, 조절변수 λ에 관해 연속상전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FES의 밀도 추측은 틀렸어도 FES의 틀이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상전이와 연관되어 있다는 얘기를 합니다.

위에 잠시 '에르고딕'하다는 말을 했는데, 이미 1990년에 그라스베르거와 만나가 결정론적인 FES는 에르고딕하지 않다는 언급을 한 논문이 있습니다. (FES는 1998년에 처음 나왔으므로 FES라는 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개념은 비슷합니다.) 이게 또 중요한데요, 에르고딕하지 않다면, 즉 상태공간이 분할되어 있다면 초기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에 따라 문턱밀도도 달라지고 임계현상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건 최근에 박수찬 박사님의 논문에서도 논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