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쓴 글이라 거칠고 오버한 부분도 있다. 그런데 또 자주 하던 얘기라... 식상해하실 분들도 있을 듯.

* 2007/06/22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을 관통하는 단순하고 일관된 규칙을 찾아내는 일은 연구자뿐만 아니라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생존하려 하는 어떤 생명체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자연과학은 이러한 규칙을 발견해온 가장 성공적인 분야 중 하나다. 시스템의 자유도를 줄임으로써 복잡성을 단순화하고자 하는 환원주의 정신은 자연과학의 영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단순함을 추구하는 것은 더 큰 보편성을 향해가는 일이기도 하다.

물리학, 그 중에서도 입자물리학은 그 환원주의를 가장 극단으로 밀고나감으로써, 세계를 이루는 근본 입자와 그들 사이에 작용하는 근본 힘에 대한 이해를 추구해왔다. 철학자인 브로드(C.D. Broad)가 환원주의에 대해 정리한 내용에 따르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계주의(mechanism)는 "세계는 단 한 종류의 행동법칙(law of behavior)을 따르는 단 한 종류의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물질들은 단 한 종류의 결합법칙(law of composition)에 의해 전체로 연결된다."는 입장이다[1]. 다른 모든 복잡한 물질/현상은 근본 물질과 근본 법칙의 다양한 조합에 의한 결과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의 입자물리학자들의 최종 목적지도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관점을 가진 물리학 분야로는 응집물질물리학/통계물리학이 있다. 입자물리학의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명백히 반대하고 있는 필립 앤더슨은 1970년대부터 최근까지 줄곧 각 수준의 학문은 나름의 근본 법칙을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펼쳐왔다. 그는 과학은 환원주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지만, 세계를 근본 법칙으로 환원하는 능력이 곧바로 그 법칙들로부터 세계를 재구성하는 능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2]. 쿼크를 몰라도 컴퓨터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란 무엇일까. 이해했느냐 아니냐는 이해되는 대상의 문제라기보다 이해하려는 주체의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컴퓨터의 사용법만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쿼크의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컴퓨터 안의 회로와 반도체, 그것들을 이루는 물질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현상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쿼크가 중요할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근본 입자와 근본 법칙에 대한 완전한 이해 없이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도 없다는 것이다. 쿼크 같은 소립자(또는 최신버전으로는 초끈)에 대한 지식 없이도 H2O의 액체-기체 상전이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H2O가 소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입자물리학과 응집물질/통계물리학이 대립되는 것으로 보여도 그 기본 정신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분야의 방법론이나 개념이 다른 분야에 응용되어 빛을 발하는 경우도 많다. 굳이 역할을 나누어보자면 입자물리학이 이 세상의 재료를 탐구하는 분야라면, 응집물질/통계물리학은 그 재료들의 집합적 행동을 탐구하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통계물리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인 상전이와 임계현상 연구에서는 재료의 자세한 특성이 때때로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물질의 종류가 달라도 그것들의 집합적 행동은 하나의 함수로 표현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세부 사항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는 보편성을 의미한다. 임계점 근처에서의 거동에 따라 다양한 시스템을 몇 개의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를 '보편성 분류(universality class)'라고 하며 어떤 특정한 시스템이 어떠한 분류에 속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으로는 구성요소 각각이 가질 수 있는 상태의 개수(예: Ising spin의 경우 +1, -1)와 그 시스템의 차원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바닥상태의 대칭성이나 눈금잡기 함수(scaling function)의 형태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도 한다. 방금 나열한 몇 가지의 속성만 같다면 그 외의 세부 사항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3].

그런데 여기서 통계물리학도 입자물리학의 환원주의와 똑같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세계가 모두 소립자들로 이루어져있다고 해서 그런 소립자들의 집합적 행동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듯이, 우리가 다양한 임계현상을 몇 개의 보편성 분류로 구분했다고 해서 각 시스템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입자물리학자의 역할이 세계의 근본 입자와 근본 법칙을 발견해내는 일이라면, 그들에게 왜 입자들의 집합적 행동을 연구하지 않느냐고 따질 이유는 없다. 마찬가지로 통계물리학자들의 일부가 임계현상의 보편성 분류를 나누는 일을 한다고, 그들에게 왜 더 복잡한 현상을 연구하지 않느냐고 따질 이유도 없다.

[1] T. O'Conner, H.Y. Wong, Emergent Propertie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plato.stanford.edu/entries/properties-emergent/ (2006)
[2] P. Anderson, More is different, Science 177, 393 (1972)
[3] S. Lubeck, Universal Scaling Behavior of Non-equilibrium Phase Transitions, Int. J. Mod. Phys. B 18, 397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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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D님 블로그의 글에 덧글을 달았던 내용과 연관되어 올린다. 세계를 쪼개어 구성요소를 이해한 후 이를 바탕으로 세계를 재구성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데에만 동의한다면, 사실 어떤 학문분야가 더 '근본적이냐'에 대한 논란은 물리학에서 불필요할 수도 있다. (정치에서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 내 블로그의 연관되는 글: 환원주의 입장(2007.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