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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앤더슨 [사진출처]

오늘 저녁을 먹다가 필립 앤더슨(Philip Anderson)SSC(Superconducting Super Collider) 건설에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립 앤더슨은 고체물리학자로서 환원주의에 반대하며, 입자물리학만이 근본적이지 않으며 다른 학문도 각자의 분야에서는 근본적이라는 주장을 펼쳐왔다. 이런 측면에서 창발/발현(emergence)의 관점을 지지하며 1972년 <사이언스>에 써낸 "More is different"라는 글이 유명하다.

SSC에 관한 다음의 내용은 <Physics in Perspective>에 실린 M. Riordan의 논문을 참고하여 정리했다. SSC는 1980년대 초반 논의되기 시작하여 1993년까지 약 20억불을 투자했으나 미국의회의 결정으로 무산된 세계최대의 입자가속기 프로젝트였다. 레이건 정부에서 시작되었고, 조지 부시가 당선되고 이틀 후인 1988년 11월 10일에 텍사스로 부지가 선정되었으며 약 30억불의 예산이 논의되는 가운데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비용증가와 외부의 자금지원 부족, 그리고 정치적 상황들이 얽혀서 클린턴 정부가 들어선 후인 1993년 10월 19일 의회에서 SSC의 사실상 취소 결정이 내려졌다.

애초에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SSC가 입자물리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고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을 정책결정자나 납세자들에게 충분히 설득시키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을 때 레이건 정부의 관료들은 미국이 입자물리학을 이끌어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의도가 있었고 그만큼의 지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업이 진행될수록 비용은 계속 증가했고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더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냉전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또한 미국은 적자를 줄이기 위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사업 비용을 늘려야 하는 상황이었고 더구나 반대파들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필립 앤더슨을 비롯한 몇몇(?) 고체물리학자들이 SSC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나도 오늘 이 얘기를 듣고 아무리 싫어도 남이 잘 해보겠다는데 훼방을 놓느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이 논문의 후주 30번을 보면, 적어도 미국 에너지부의 지원을 받는 분야 내에서는 SSC에 대한 투자가 다른 분야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SSC에 반대하는 과학자들의 목소리에 의해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람들은 자신들이 과학에 반대하는 것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이 논문의 저자는 쓰고 있다. 어쨌든 필립 앤더슨의 반대가 SSC 취소의 결정적인 이유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작년 11월에 <Physics World>에 실린 필립 앤더슨의 인터뷰를 보면, SSC는 반대했지만 입자물리학의 과대 선전(hype)만 없으면 지금 유럽에 건설중인 LHC에는 반대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여전히 입자물리학의 환원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뭔가 내 생각도 적고 나름의 정리도 하고 싶지만 생각보다 길어져서 힘이 든다. 참고할만한 기사와 블로그를 소개하는 것으로 마쳐야겠다.

+ 오마이뉴스 기사 "물리 이론의 끝, 과학전쟁의 시작" (2007. 2. 19.)
+ ExtraD님 블로그의 More is different? (2005. 10.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