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서 주절거린 것보다 좀더 떠올리기 쉬운 그림으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행성에 두 개의 의견(A 또는 B)만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해봅시다. 사람들은 행성 표면에 균일하게 퍼져 살고 또한 자기 자리에서만 산다고 가정합니다. 이들은 이웃들하고만 교류할 수 있지만 어떻게든 행성 반대편에 있는 사람의 소식을 건너건너 들을 수도 있습니다. 즉 모두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들은 주위 사람들과 갈등이 생기는 걸 싫어해서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온순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온도가 낮아서 시원할 때만 그렇고, 기온이 높아지면 불쾌지수가 늘어나서 주변 사람들의 의견과 무관하게 제멋대로 살려고 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온도가 어떤 특정한 값(이걸 T_c라고 하죠)보다 낮으면 서로 맞춰주려고 해서 같은 의견을 가진 영역이 생기고 그 영역이 넓어지면 행성 전체적인 '질서'가 나타납니다. 반대로 온도가 T_c보다 높으면 이런 영역이 깨지면서 저마다 제멋대로의 의견을 가지며 전체적으로 '무질서'해집니다.

이렇게 특정한 기온을 기준으로 질서-무질서의 변화가 일어나는 걸 상전이라 합시다. 그리고 다음에 나올 이야기와 대비시키기 위해 위의 상전이를 '깨끗한 상전이'로 부르겠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행성에 화성인이 침공하여;;; 사람들을 랜덤하게 죽이기 시작합니다. 행성의 상공을 빙빙 돌다가 기분이 내키는대로 총을 쏴서 아무나 죽이는 겁니다. 행성의 총 인구 중 죽은 사람의 비율을 p라고 합시다. p가 작으면 행성 표면 군데군데 빈 자리가 생기는 정도이며, 아직 행성 반대편에 사는 사람과 건너건너 연락할 수 없을 정도로 절단나지는 않습니다. p가 어떤 특정한 값(p_c라고 하죠)보다 크면 행성 전체적인 연락망은 파괴되고 서로 단절된 국소적인 마을들이 여기저기 행성 표면에 흩어져 있는 모양새가 됩니다.

아직 화성인이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p가 p_c보다 작은 상황이라고 합시다. 사람들은 무슨 큰 일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두 개보다 많은 의견을 갖기에 뇌용량이 부족하여(1 bit;;;) 여전히 A 또는 B 중 하나의 의견만 갖습니다.

p가 아직 작더라도 행성 곳곳에는 외부와 단절된 마을이 이미 나타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을을 제외하면 여전히 표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커다란 사회는 그럭저럭 유지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저기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이웃의 숫자 자체가 줄어들어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맞추려는 힘이 약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보니 기온이 조금만 높아져도 금방 무질서해지려는 경향이 생깁니다.

다시 말해서 질서를 유지하려면 기온이 더 낮아져야 한다는 걸 뜻합니다. (p가 커질수록 p의 함수인 T_c(p)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또한 T_c(0)은 '깨끗한 상전이'의 임계온도 T_c입니다.) 그런데 이런 효과는 자신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우연하게도 행성의 어떤 동네는 죽은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화성인이 랜덤하게 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동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화성인의 침공은 달나라 얘기일 뿐입니다. 이들은 이전과 다름 없이 T_c에서 상전이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주변에 사람들이 죽어나간 동네에서는 T_c(p)에서 상전이가 일어납니다.

동네에 따라 상전이 온도가 달라진다니,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온도가 T_c(p)보다 낮으면 전체적인 질서 상태가 되고, T_c보다 높으면 전체적인 무질서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기온이 그 사이일 때는 생각을 좀 해봐야 합니다.

일단 죽은 사람이 없는 동네가 나타날 확률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특히 동네의 크기가 커질수록 더욱 그렇겠죠. 이런 동네의 기온이 T_c(p)와 T_c 사이이면, 일시적으로 질서가 잡힌 상태에 머물 수 있겠지만 주변에 있는 사람이 죽은 동네에서 발생한 무질서의 영향으로 언젠가는 질서가 깨집니다. 주변의 무질서한 동네의 기운이 질서잡힌 동네로 흘러들어와 결국 무질서하게 만들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이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려서 정상상태(즉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상황을 그리피스 특이성 또는 그리피스 상태라고 부릅니다. 하여간 무슨 일을 해도 그 일이 자리잡힐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상태라는 말입니다.

여기까지 해서 무질서와 임계현상이라는 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얘기들은 마친 것 같네요. 앞으로 비평형 상전이에 무질서가 끼치는 영향에 대한 내용들을 공부하다가 또 올릴만한 이야기가 생기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